[봄이 와도 그리움은] – 김용균

에움길로 돌더라도
조급해 하진 말지요
고섶에 봄이 웃고 있어도 꽃은
제 날자 채우고야 피던걸요.

그많은 다스름의 밤인데도
동살녘에는
검 기우는 마음.

당신은 돋을양지에 피는
색 고운 꽃.
내사 뭐
갈고리달 처다보는 갈목같은 신세.

목밑에 봄이와서
꽃잠깬 봉우리들
살품 풀며 웃어도

내맘, 오직 당신 꿈머리에서
갓 밝기로,달 물결로
그저 고즈녁한
그리움의 외로운 별하나 인걸요.

[교회의 문서들(신조, 신경, 문답 등)]

(이번 학기에는 한 그룹과 교회의 문서들 – 신조, 신경, 문답 등 – 을 살펴보는 중이다.)

혹은 성경만을 내세우며 문서들을 무용하다 보기도 하고 혹은 (특정) 문서들에 절대적인 권위를 두고 가치를 부여하기도 한다. 나는 문서들이 무용하다고 보지도 않고 거기에 절대적인 가치를 인정하지도 않는다. 문서들은 교회 역사의 산물이며 교회는 필요에 따라 문서들을 만들고 수용해왔기 때문이다.

앞의 문서가 완벽했다면 또 다른 문서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서들은 계속 작성되었다. 니케아 신경 이후 벨직 신앙고백과 웨스터민스터 문서들 그리고 근현대의 조직신학 정리들과 각 교단의 헌법들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인 문서를 만들어보려 하는 경향은 분명하지만, 재작성되는 문서들과 더 이상 재작성되지 않는 성경을 볼 때, 문서들이 성경을 대체하지는 못한다는 것은 여전히 더욱 분명하다.

오히려 최근의 로잔 언약들처럼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문서들이 다시 강세를 보이는 듯도 하다. 교회의 소속은 역사 바깥에 있지만 현상적 교회까지 역사 바깥에 있지는 않은 까닭이고, 현상 세계는 다종다양한 부침들로 연속/구성/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벽하지 못한 교회 문서들을 우리가 재고해야 하고 또 재고를 격려해야 하는 것은 그 역사를 통과하던 교회가 무엇을 지켜왔는가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는 또한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것을 문서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서들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이고 문서들의 추이는 교회의 일대기/전기이다. 위인들의 전기를 통해서도 우리는 배우는데 하물며 교회의 문서들을 통해서야 어찌 배울 수 없으랴. 아니 배워야 하지 않으랴. 그리고,

지금 교회에 남아 있는 객관적인 단 하나의 기초는 성경 뿐인데 문서들은 교회를 세우고 있는 그 성경의 각종 요약이기도 하다. 요약은, 그것에만 기대는 경우 해악이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명징성’과 ‘편리성’의 의미에서 유익한 점이 분명히 있다. 다시 문서들을 살펴보자. 특별히 교회의 각종 교육기관들은 그리 하자.

[Just A Freckle Faced Soldier]

오늘 하기로 마음 먹고 있었던 일을 갑자기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어 푸근한 마음이 되었던 차에 어제밤 혼자 영화를 한 편 보았습니다. 영화 제목은 [Taking Chance]. 죽음과 삶의 경계를 죽 따라가는 진행은 소란스럽지 않아 즐거웠지만, 전체적으로는 미국 영웅주의의 부산물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영화이고 나아가서는 ‘모병 영화’의 역할까지도 욕심을 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 거는 건, 영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노래 하나 같이 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전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때 떠오른 노래는, 우리나라에서는 [돌아오지 않는 소년병]으로 알려진, Colleen Lovett의 [Just A Freckle Faced Soldier]였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노래인가요? 전쟁이 언제 그칠지는 다 아시지요? 뜬금없지요?

[메타세콰이아 Metasequoia glyptostroboides]

메타세콰이아는 낙우송과 비슷하면서도 훨씬 시원시원하게 생겼는데, 중국의 the Great Green Wall 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대구에도 두어군데서 그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다(더 있는지 있으면 얼마나 더 있는지는 모른다). 한 곳은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앞길이고, 또 한 곳은 봉무공원 들목이다.

이 솔방울(Mature female cones)은 봉무동의 것인데, 지난 가을 유리창이 깨지듯이 잎이 한꺼번에 떨어질 때 떨어지지 않고 가을내 달렸 있다가 겨울을 지나면서 어쩔 수 없어 떨어졌으리라. 지난 가을 잠자리 날개처럼 솟아난 씨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사진을 찍은 장소는 영신초 4-4 교실이다. 학동의 책상위로 저녁빛 한 줄기 드리웠다.

교육 교재로 되지 않는 교육

수업 시작 시간, 책상 24개, 빈 책상 없음, 음 전출이군. 이러지 말고 이름을 부르면서 눈을 맞추자. 한 놈씩 끌어 안고 비벼주자(학부모들에겐 오해 없도록 미리 말씀드리자). 냄새 나는 놈도 끌어 안고 비벼주자. 싫어하는 놈들은 손이라도 잡아주자. 숙인 채로 녹슬어버린 놈들의 목을 잡고 삐걱삐걱 조금씩이라도 뒤틀어보자. 하늘을 바라보게, 사람도 바라볼 수 있게. 그리고 그 속으로 함께 걸을 수 있게.

성교요지와 성교

여기 블로그에 [광암 이벽(李檗)]의 [성교요지(聖敎要旨)]를 몇 번 번역하여 올렸더니 영문판 위키백과 [이벽 항목(http://en.wikipedia.org/wiki/Yi_Byeok)]에 외부 링크로 등재(되는 영광?).

문제는 등재하는 사람이 [ ... tag/성교요지/]로 올려야 할 것을 [ ... category/한문/]으로 등재했다는 것. 앞으로 내가 한문 categotry에 성교요지 내용 외에 다른 글들은 더 올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는 건지.

또 하나 재미 있는 건, 나의 블로그 링크 바로 윗줄인데, ‘네이버’를 말해놓고서는 ‘다음’의 링크를 걸어 놓고 있다는 것. 이래 저래 백과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있군.

내친 김에 하나 더.
블로그의 [성교요지] 번역물을 찾아 오는 외부 검색 엔진의 검색어 중에 [성교]가 꽤 된다는 것. 언제 정말 성교(coitus)에 대하여 한 꼭지 올려서 사람들 좀 헷갈리게 만들어 볼까 하는 마음도 …

[목사직과 월급과 세금]

그리스도인은 사는 것 자체가 거룩한 업이니, 모든 그리스도인의 직업은 다 성직이라고 해야지. 분위기들을 보니 목회는 성직이고 월급쟁이는 세속의 직업이라고 생각들 하는 것 같다. 목사직은 특별한 성직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성직 중의 하나일 뿐이고, 단순한 기능직 중의 하나일 뿐이다. 목사는 목사의 기능을, 집사는 집사의 기능을 하는 것. 그러니까 월급 문제는, 국가에서 내라면 내는 거고 국가에서 안 내도 된다면 국가에 감사하고 안 내도 되는 거지, 교회이기 때문에 또는 목사이기 때문에 못 낸다는 건 넌센스!

목사직에 대해 한 마디 더! 스피커는 중요하지만 스피커 자체를 거룩하다 하지는 않고, 스피커에 금칠을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찢어지는 소리를 내거나, 화이트 노이즈를 포함해서 과도한 소음을 내거나, 왜율이 커지면, 버리고 새 스피커를 사야 할 밖에. 있는지 없는지도 알아차릴 수 없는 스피커가 최고의 스피커다.

목사여, 월급에 신경 쓰지 말고, 안 주면 안 주는 대로 안 받자. 주면 주는 대로 받지 *말고* 과하다고 여기자. 번쩍번쩍 하는 차 타고 다니면 좀 부끄럽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