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마가복음

[마가복음 6:30-52] 쉬지 못하는 이유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쌔 33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50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마가는 헤롯과 대비되는 왕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데 그 왕의 이름은 예수이다. 양을 사랑하지 않는 삯군 목자 같은 헤롯과는 달리 예수의 왕 노릇은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참된 목자의 모습이다. 에스겔이 예언한 대로 왕이 목자가 되고 목자가 왕이 된 것이다(겔34:23). 그런데 여호와께서 세우시는 그 목자-왕은 다른 이가 아니라 여호와 자신이다(겔34:15). 그러므로 결국 여호와 자신이 자신을 목자와 왕으로 세우고 여호와께서 스스로 목자 노릇과 왕 노릇을 하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 약속을 이루려고 여호와 자신이 실제로 오셨다. 그가 바로 참 목자와 참 왕으로 오신 예수이다. (그래서 예수가 언약의 실체요, 언약의 하나님이요, 곧 여호와이다.)

세상의 왕은 백성의 것을 빼앗아 자기가 먹지만 하늘로서 오신 왕 예수는 자신의 것으로 백성을 먹이신다. 하늘로서 오신 왕 예수는 하늘의 것으로 이끌어다 먹이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의 양, 그의 백성은 빈들에서도 평안히 거할 수 있다. 들이 비어 있다고 하늘까지 빈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참 목자가 거기 있다는 오직 그 하나의 이유 때문에 빈 들은 더 이상 빈 들이 아니요, 오히려 빈 들은 푸른 풀밭이 되고, 잔치 자리가 되고, 아무 것도 없던 그곳이 은혜와 안식의 처소가 된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아직은 예수 자신만 알고 있다. 그리고 여기의 제자들이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것 역시 아직 예수만 홀로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백성을 위하여 떡을 걱정하는데 비하여(35-36) 예수께서 백성을 불쌍히 여겨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시는 것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백성을 참으로 불쌍히 여기는 것도 예수 홀로 뿐이다. 빈 들에서 자신의 안식을 드러내신 예수께서는 자신의 할 일을 다 하시고서는 갑자기 제자들을 재촉하신다. 주께서 재촉하시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 제자다.

‘내가 사람들을 보낼테니 너희들은 다시 바다를 건너 벳세다로 가거라’(45)

제자들은 잠시 앉아 쉴 틈도 없이 떠나야 했다. 45절의 ‘가게 하셨다’는 말은 ‘가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로 떠나게 하셨다’는 뜻이다. 이런 가운데서 제자들은 자신들이 쉬기 좋은 곳에 와서 잘 쉬다가 간다고 생각했을까? 아마 전혀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 왔어도 찾아 오는 사람들이 많아 밥먹을 짬도 없어서 정말 쉬고 싶던 차에,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좀 가서 쉬자고 하시는 말씀을 따라 나섰더니(31-32), 그 따로 한적한 곳은 아늑한 곳이 아니었고 오히려 쉬는 것과는 거리가 먼 빈 들이었으며, 그 빈 들조차도 수천 명인지 수만 명인지도 짐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바글거리고 있었다. 어렵사리 사람들과의 전쟁을 치루어내고 이제 이 빈 들에서나마 좀 쉴 수 있을까 하는데, 쉬게 해 주시겠다고 하시던 선생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자들을 재촉하신다.

그래서 제자들은 선생님의 재촉에 숨 돌릴 틈도 없이 움직여야 하고 떠나야 한다. 47절을 보라. 저녁이 왔다. 빈 들에서도 때가 저물어 있었으니 이제 바다에 왔을 때는 더욱 저물었을 것이다. 저녁은 안식의 시작이요, 밤은 곧 안식이다. 그러면 황혼이 깃든 저녁 바다와 그 위에 떠 있는 배, 거기에서는 혹시 제자들이 쉴 수 있을까? 혹 이제부터 시작되는 밤에는 쉴 수 있을까? 아니다. 제자들은 계속 쉴 수 없다. 계속 쉴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디서고 쉴 수 있는 곳이 없다. 제자들은 쉴 수 없음의 연속 가운데 있다. 쉴 수 없음의 시공간에 그들은 있다. 땅에서 맞닥뜨린 상황에 흔들리던 제자들은 바다에서도 여전히 흔들거린다. 배도 흔들리고 마음도 흔들리고 온통 흔들리는 것뿐이다. 가고자 하는 곳으로부터 불어오는 맞바람을 맞으며 괴로이 노젓는 제자들은 도무지 쉴 수가 없다. 그들은 아마 ‘왜 하필이면 벳세다로 가라고 하셨을까?’ 생각하며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며, ‘왜 우리들보고 먼저 가라고 하셨을까?’ 생각하며 투덜거렸을 것이다. 가라고 하신 곳이 벳세다만 아니었어도 맞바람을 받지 않았을 것이니 조금은 나았을 것이며, 벳세다로 간다고 할지라도 선생님이 배를 같이 타기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다가 어려우면 ‘다른 곳으로 갑시다’ 하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왜 제자들을 ‘즉시 재촉하…’셨을까.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함께’ 배에 오르는 것이 훨씬 더 났다는 것을 모르셨을까? 아무 것도 없는 빈 들에서 능력으로 음식을 마련하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셔야 했더라도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일은 제자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혹자는 제자들이 메시아 열광주의에 오염되지 않도록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그것은 요한(6:14f.)의 관심사이지 마가(와 마태)의 관심사는 아니다. 또 다른 혹자는,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하는 46절을 보면서 짐작하기를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제자들을 먼저 보내신 것이다’라고 하면서 예수께서 기도의 중요성을 그런 방식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 정말 기도하시기 위해서 따로 시간을 마련하신 것일까? 그렇다면, 정 기도가 하고 싶으시다면, 사람들 돌려보내는 일은 제자들에게 맡겨 놓고 바로 산기도 가시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예수님이 정신없는 분이라고 우리가 함부로 단정지을 수 없다면 이렇게 빈 들에서나 바다에서 이렇게 끌고 다니시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쉬러 가자고 하신 분이 이렇게 계속 밀어 붙이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쉴 수 없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철저히 제자들의 안식을 유린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렇다. 진짜 안식이 무엇이며 진짜 쉰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는 제자들의 쉼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그들의 기대를 배반하시는 것이다.

빈 들일지라도 거기 참 목자가 있었기에 광야가 오히려 안식처가 되는 것과 같이, 바다에 불던 바람이 그치는 것도 예수께서 거기 계시는 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보내시는 것은 예수가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철저히 깨닫게 하심으로써 예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를 가르쳐 주려 하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멀리 있다. 제자들은 예수의 일하시는 것을 보기 전에도 예수를 알지 못하고, 예수의 일을 보고 난 뒤에도 예수를 알지 못한다. 이 빈 들에서 어떻게 양식을 구할 수 있으랴 하면서 사람 사는 곳 – 동네 – 에 가야 사람의 양식을 구할 수 있으리라던 제자들이 자기 살과 피를 짖고 쏟아 나누어 먹이실 예수, 생명의 떡 예수를 알지 못하듯이, 바다를 밟고 그 위를 걸어 오시며 바람을 멈추시는 예수를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보지 못해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보아도 역시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다. 바다를 걸어 오시고 바람을 멈추게 하시는 예수가 오히려 심히 놀람의 대상이 된다(50). 이 사람이 누구냐, 이 선생님이 도대체 누구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참으로 영육간에 쉴 틈이 없다. 몸이 쉴 수 없는 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쉴 틈 없이 몰고 다니시기 때문이요, 영혼이/영혼도 쉴 수 없는 까닭은 예수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언제까지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쉼을 방해하실 것이며 언제나 되어서야 제자들은 진짜 쉴 수 있을까? 그 때가 오기는 오는 것일까? 그렇다. 그때는 장차 올 것이기도 하지만 이미 온 것이기도 하다. 그 때는 때라기보다는 인격이며 사건이다. 시간과 사건이 하나의 통일장으로 들어간다. 십자가와 부활 때가 제자들의 쉴 곳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죄짐을 대신 지고 죽음을 맞이하시는 사건이 제자들이 쉴 때이다. 죽었던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모든 믿는 자가 담대하게 될 때 거기가 쉴 곳이다.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산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는 쉴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아무도 없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쉼을 방해하시는 것은 참된 쉼을 향하여 가리키는 이정표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혹시 아무리 해도 쉴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거든 예수의 지극한 관심이 여러분을 은혜롭게! 괴롭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혹시 예수께서 오늘 우리를/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고 끌고 다니시는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아! 이제 곧 올 것이 오고야 말겠구나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이젠 이 땅에서 아무리 해도 쉴 수 없어서 결국은 예수 안에서 밖에는 쉴 곳이 없는 그런 사람이 되는구나 생각하면서, 우리 각자의 인생을 포기하는 그 날이 우리 위에 속히 덮치기를 바란다. 이미 그렇게 된 사람들에게는 더 드릴 말씀이 없다. 예수 안에서 죽는 것이 바로 잔치집으로 들어가는 기쁨의 문이라는 비밀을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 죽는 즐거움을 버리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마가복음 6:30-45] 따로 한적한 곳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쌔 33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 지난 이야기

앞에서 회개와 능력을 함께 관련지어 생각해보았다. 조금 요약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능력은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나타냄으로써 능력을 나타내었다. 예수를 나타냄이 능력을 나타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능력은? 예수 자신을 보여 주는 것이 예수의 능력이었다. 제자들의 능력? 그렇다. 예수를 전하는 것이 제자들의 능력이다. 그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분이기에 그의 오심, 그의 등장이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나타남이 곧 능력의 나타남이고, 그를 전하는 것이 곧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인간이 나타나는 것은 언제나 능력이 아니다. 성경은 오히려 인간의 능력이 나타나려고 할 때마다 회개하라고 한다.

회개하라는 말도 다른 뜻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시해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회개하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너를 믿지 말며 너의 능력을 믿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 이제는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회개하라는 말이다(행19.4; 마3.11ff.; 막1.4-8; 행13.24). 그러므로 회개한다는 뜻은 예수를 믿는다는 뜻이며 예수를 영접한다는 뜻이며 그것은 곧 예수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새로운 나라에 투항한다는 뜻이다. 그는 나라 자체로 오시는 분이며, 새로운 나라를 가져 오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서나 예수를 전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로 말미암은 새로운 나라의 도래를 전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요한도 예수도 공히 회개라는 말을 천국의 도래와 함께 붙여서 사용하는 것이다(마3.2; 4.17). 또 그렇게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는 말이 회개하라는 말과 같은 뜻이 되는 것이기에, 제자들이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이 가까웠다고 전파하는데(마10:7) 마가복음에서는 회개하라고 전파하는 것이다(막6:12).

복음서는 ‘몸소 천국 auto basileia’으로 오신 예수에 대한 증거에 골몰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천국은 자기 안에만 있다는 것과, 천국은 자기 홀로 다 만들어 가는 것이니 이 천국 사업에 인간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 할수록 인간들의 발악도 그 이상으로 거세다는 이야기가 서로 교대로 나타나고 있다.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헤롯과 헤로디아는 요한을 죽여 버려서 더 이상 자기들의 천국을 방해하는 자가 나타나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자기들이 죽였던 그 세례 요한이 예수라는 사람 속에 여전히 숨쉬면서 죽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어떤 사람을 세례 요한인 줄 알고 죽였는데 옆 사람이 요한으로 변하더니 ‘나 여기 있지롱!’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예수의 죽음을 내다 보는 것이다. 그러나 헤롯이 예수 소문을 듣고 세례 요한이 죽지 않고 다시 살아 났다고 하는 것은 이 예수 또한 죽어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 날 것을 시사하고 있다. 실제로 예수는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 마가는 지금 여기에서 예수의 부활을 알고 있는 마가복음의 독자들에게 예수를 증거하던 요한이 죽었다는 것이나, 자신을 증거하던 예수가 죽었다는 것이나 그 어느 것도 위협과 근심의 제목이 못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가는 죽어도 상관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죽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따로 한적한 곳

이어지는 이야기는 예수와 함께 하는 천국을 보여 주는 것이다. 회개하라는 말이 천국이 왔다라는 말과 같다고 했다. 천국이 왔으니 천국이 아닌 나라를 버리고 이 천국을 맞아 들이라 하는 것이다. 천국이라고 하니까 다분히 지금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에 될 일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천국은 시간과 관계하는 나라가 아니다. 천국은 공화국이 아니라 왕국이다. 천국은 왕과의 관계가 핵심인 나라이다. 천국에 대해서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은 왕과 어떤 사이냐 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천국에 관한 모든 것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제는 이 아들 예수와 관련지어 천국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본문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자신이 자기 백성을 먹이시고 돌보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34절에서 예수께서는 무리를 보고 목자 없는 양 같다고 생각하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다. 예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다고 하는 것은, 헤롯이라는 왕 같잖은 왕이 있지만 그 왕은 왕이 아니라고 하는 말과 같다. 그 왕은 자기 생일 잔치로 바쁘신 몸이고 헤롯과 함께 자리에 앉은 귀인들도 귀한 공주가 춤추는 보기 힘든 춤을 보면서 헤롯과 기쁨을 나누기에 바쁘다. 헤롯왕가는 백성과는 관계없이 그렇게 자신들의 기쁨에 젖어 있다. 백성들은 헤롯의 즐거움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먼저 31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쉴 것을 말씀하신다. 일한 사람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 쉬지 않으면 일할 수도 없다. 일하는 것도 순종이지만 일 욕심을 멈추고 쉬는 것은 더 귀한 순종일 수 있다. 옳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지금 저쪽에 가서 좀 쉬어라는 정도의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는 의도적으로 제자들을 어떤 곳으로 이끌어 가신다. 제자들의 쉼을 위해 예수께서 마련해 놓은 곳이 따로 있다. 그곳으로 오라는 말씀이다. 그곳은 따로 한적한 곳이라 불리는 곳이다.

31절과 32절에서 따로 한적한 곳이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타나면서 그 의미가 부각된다. 이제 이 말씀을 죽 따라가 보면 사람들이 같은 곳으로 모이는 것을 알게 된다. 먼저는 제자들이 예수로부터 인도받아 따로 한적한 곳으로 움직인다. 그러자 무리들도 바삐 따라 움직여 동일한 장소, 한적한 곳으로 모인다. 모두 따로 한적한 것에 모였는데 그곳은 빈들이다(35). 거기는 광야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광야로 이끌어 내시고 백성들도 함께 광야로 이끌어 내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렇게 이끄신 것은 그들의 쉼, 즉 안식을 위해서이다(31). 제자들의 쉴 곳이 광야라면 제자들을 따라 온 큰 무리도 쉴 곳 역시 광야이다. 예레미아는 이미 옛날에, 백성이 은혜를 얻는 곳이 광야이며 그 은혜는 곧 안식이라고 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증거하였다(렘31:2). 아무 것도 없는 광야가 은혜와 안식의 장소가 되는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인자와 인도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렘3:3).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은혜와 안식을 베푸시니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더욱 선명하다.

렘 31: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3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우리는 광야 같고 빈 들 같은 그 따로 한적한 곳에서 이제 곧 헤롯의 잔치와는 또 다른 잔치가 열리는 광경을 보게 된다. 광야는 원래 가난한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화살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된 작은 도시락 하나로도 잔치가 벌어지는 그곳으로 향해 있으면서 ‘새로운 잔치를 여시는 분이 누군가’ 하는 것을 주목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끌고, 그 이끌림에 따라가는 제자들, 건너 가는 바다, 제자들과 함께 있는 큰 무리들, 그리고 큰 무리 위에 베풀어지는 양식, 이렇게 출애굽의 이미지들로 가득하게 마가복음은 나아간다. 마가는 이렇게, 예수로 말미암은 새로운 출애굽을 묘사하는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은 배를 타고 모세와 백성이 되어 홍해를 건너듯이 바다를 건너면 거기가 따로 한적한 곳이며 그곳은 빈 들이며 하늘로부터 만나가 내리는 광야이다. 이 본문은 예수로 말미암는 새로운 출애굽을 이야기 할 뿐 아니라 출애굽한 백성들의 광야 생활과 그 광야에서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계시한다.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라고 하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출애굽과 광야의 여정을 이야기하니까 33절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지 않고 도보로 갔다고 하는 이야기 때문에 신경 쓰일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모세 예수와 함께 하는 새 백성은 많은 사람(33)이나 큰 무리(34)라기보다는 제자들이다. 많은 사람이나 큰 무리가 새로운 이스라엘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제자들과 함께 하는 것 때문이다. 출애굽 이후에 태어나 직접 홍해를 건너지 않은 자라도 직접 건넌 사람들과 함께 이스라엘로 불리는 것과 같다.

제자들이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예수만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예수의 지식만이 이스라엘이 누군지 알고 있다.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도 예수뿐이다. 헤롯은 아예 백성에 대한 긍휼이 없고, 제자들의 긍휼은 긍휼이 아니기 때문이다. 35-36절에서 나타나는 제자들의 긍휼과 34절의 예수의 긍휼을 비교해 보라. 마가는 예수의 긍휼이 ‘가르침’이라고 한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불쌍히 여기셔서 ‘먹이시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신다.’ 주의 가르침이 주의 자비이다. 이어지는 광야의 이야기도 예수께서 자기가 누군지를 가르치시는 이야기이다. 먹이시는 것이 긍휼이 아니라 먹이시는 분이 누군가를 보여 주시는 것이 긍휼이라는 말이다. 예수 자신이 바로 하늘로서 내리는 만나이며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에게 있어서 광야는 ‘불가능’과 ‘아무 것도 없음’으로 가득한 곳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무리를 여러 가지로 가르치는 것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빈들에 때는 저물어 가고 사람들의 입은 수없이 많고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말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설교를 듣고 있다가 결국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먹고 합시다!’
예수의 대답도 걸작이었다. ‘너희들이 먹여라!’
제자들은 계산해 본다. 적게 잡아도 5백만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런 돈이 없다. 그래서 무례한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우리한테 돈이 어디 있습니까? 돈 없는 거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이 제자들의 말은 옛날 믿음 없던 모세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 …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민11:13, 22)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이라 하신 것은 그들의 믿음 없음과 무능력을 드러내고 또 진실로 먹이실 자가 누군가를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무리들을, 식사 추진 차량과 배식을 기다리는 훈련병 군인들처럼 또는 즐거운 마음으로 소풍 나온 병아리 유치원 원아들처럼 푸른 잔디 위에 무리지어 앉게 하셨다. 그리고서는 이렇게 기도를 시작하셨을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예수의 기도는 이렇게 노래같이 이어졌지 않았을까.

날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니 은혜로우신 아버지 참 감사합니다.

  • 나가며

모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자기가 죽은 후에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도록 한 목자를 구하는 기도를 올린다(민27:15-17).

민 27:15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와 가로되 16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17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여호와께서는 기다리셨다는 듯이 신에 감동된 자 여호수아를 제시하셨다(민 27:18). 그러나 모세가 죽었듯이 여호수아도 죽었다. 때가 차매 영원한 모세요 영원한 여호수아가 왔다. 그는 예수시다. 아들 예수는 자기 살과 피로 자기 백성을 먹이심으로써 자신이 ‘참’ 목자임을 증명하셨고, 아버지는 아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써 이 아들이 ‘영원한’ 목자임을 증거하셨다.
광야 같은 세상일지라도 우리 성도는 (성도라면!) 이미 목자 없는 양이 아니다. 예수가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있다는 사실이 성도에게 주어진 사실이다. 빈들일지라도 예수가 있으면 바로 그 빈들이 예수와 함께 쉴 곳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 외에는 아무 것도 더 바랄 것이 없는 주의 백성이기를 소원한다.

[마가복음 6:11 - 31] 예수와 제자 III, 여행자의 운명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14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하고 15 어떤 이는 이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이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16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17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18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9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21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쌔 22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 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23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24 저가 나가서 그 어미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미가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25 저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한대 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28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여아에게 주니 여아가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니라 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14절 이하의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이다. 그는 B.C. 4년에서 A.D. 39년까지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이었는데 분봉왕(分封王)은 영주(領主 tetrarch)라는 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속령의 영주에 불과한 그에게 로마 황제는 공식적인 왕실 칭호를 허락하지 않았다. 마가가 그를 왕으로 부르는 것은 왕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그의 탐욕과 함께 나타난 지방관습적인 칭호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의 참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그를 풍자-대비하고자 하는 의도도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왕되심 앞에서 헤롯의 왕권을 대비시키는 이 부분을 살펴보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어쨌든, 그는 예수 소문을 듣는데 헤롯은 그를 세례 요한이라 하고[1] 어떤 이는 엘리야라 하고 어떤 이는 선지자라고 한다. 이 내용은 나중에 예수와 제자들의 ‘~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문답 속에 잘 반영되어 다시 나타난다(8.27ff.). 여기 6장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 헤롯이 예수의 소문 속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세례 요한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소문의 주인공 – 예수와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동일인이라고 생각할 정도이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롯이 세례 요한을 떠올리는 것은 세례요한과 예수 이 양자간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발견되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마가는 헤롯(혹은 사람들)의 입을 빌어 예수와 요한의 공통점을 ‘능력’이라고 말한다(14). 헤롯은 들려 오는 예수의 소문 속에서 세례 요한의 ‘능력’의 소문도 함께 들은 것이다.

그 예수의 능력은 ‘요한의 능력과 같은 어떤 것’이었다. 헤롯은 요한이 다시 살아났으므로(14절, 그러므로 = 그가 다시 살아 났으므로) 요한과 같은 능력을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쉽지 않은 문제가 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능력인가 하는 것이다. 마가가 헤롯과의 관계 속에서 돌아보고 있는 요한을 더듬어 보라. 요한이 병을 고쳤다는 말도 찾아 볼 수 없고 귀신을 쫓아냈다는 말도 찾아 볼 수 없다. 요한은 그런 종류의 능력을 행한 적이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요10.41). 그러면 예수와 요한 사이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공통점으로서의 ‘능력’이 도대체 어떤 종류의 능력이란 말인가?

다른 공통점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것은 ‘회개하라는 말’이다. 예수는 일찍부터 회개하라 하셨고 둘씩 둘씩 보냄을 받고 나간 제자들도 예수를 따라 하는데 그 제자들의 말(11, 너희 말)은 회개하라(12)는 말이다. 이 회개하라 하는 말은 요한의 입에서도 벌써 나온 것인데 이 말이 헤롯을 향하여서도 날아갔던 것이다. 그것은 헤롯을 향하여 ‘옳지 않다(18)!’고 한 것이다.

이 회개하라는 말을 더듬어 보면 이 말이 역사와 전통이 있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구약까지 다 보는 것은 양보하고 신약에서만 보면, 그 말은 세례 요한의 첫 외침이었고(1.4 par. 마3.2; ; 행13.24; 19.4), 예수의 첫 외침이었고(1.15; par. 마4.17), 제자들의 외침의 첫 내용이 되어야 했다(막6.12). 그리고 이 회개는 그들이 처음으로 그리고 한번만 하고 그친 것이 아니다. 세례 요한이 계속 이야기한 것이고(마3.8; par. 눅3.8; 마3.11), 예수께서 끊임없이 요구하신 것이며(마11.20ff.; 눅5.32; 11.31f.; 13.3ff.; 15.7ff.; 24.47; ), 제자들의 입에서도 여전히 계속되던 말이었다(행2.38; 3.19; 8.22; 20.21; 26.20; 롬2.1ff.; 고후7.9f. 딤후2.25). 이렇게, 회개하라는 말은 그들의 첫마디였을 뿐 아니라 계속되는 외침이며 마지막 외침이기도 한 것이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는 말로 시작했다가 회개하라(18절, 옳지 않다)는 말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이 회개에 대한 말씀은 요한계시록까지 쉼 없이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능력이다. 세상에 대하여 틀렸다고 하는 말, 이것이 능력이다. 세상을 부인하는 것, 그것이 능력이다. ‘틀린 세상에 예수를’ 예고하는 것이 세례 요한의 능력이었다면, 스불론과 납달리 같은 ‘어둠의 땅에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증거하는 것은 예수의 능력이다. 예수의 오심이 예수의 능력이라는 말이다. 예수의 자기 증거가 예수의 능력이었다면, 제자의 예수 증거는 제자들의 능력이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세상 나라를 버리고 예수 나라를 받아 들이라 하는 것이 회개하라는 말이다. 회개하라는 말은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심판을 선언하는 것이다. 회개하라는 말이 그치면 더 이상 회개의 기회는 없는 것이지만 회개할 것이 있는데 회개하기 싫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듣기 거북한 말이 바로 이 말일 것이다.

본문은 헤롯이 요한을 죽이는 것을 통하여 회개치 않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회개를 싫어하는 사람이 회개를 요구하는 예수에게 결국 어떻게 대할 것인지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도 대할 것인지를 보여 준다. 다시 말하면, 이 이야기는 ‘회개하라’고 하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이 결국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 주는 동시에, 회개치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모습을 극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가는 길게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열 한 절(14.1-12), 누가는 다섯 절(9.7-9; 3.19-20)로 처리하고 있는 이야기를 마가는 열여섯 절에 걸쳐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길어진 이유는 헤로디아 이야기 때문이다. 마가는 헤로디아를 독특하게 부각시켜서 헤롯과 헤로디아를 함께 생각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가 구약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 본문의 이야기, 헤롯과 헤로디아와 요한 이야기가 옛날 아합과 이세벨과 엘리야 이야기의 재판(再版, revised edition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세벨과 헤로디아는 자기 삶을 갖고 있었고 자기의 세계/영역이 있었다. 거기서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행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도 가만히 있지 못했고 요한도 입을 다물고 있지 못했다. 엘리야는 이세벨이 가지고 들어 온 식탁을 엎어서 쓰레기로 만들어 버렸고 요한은 음란하게 누워 있는 헤로디아의 침상에서 이불을 걷어 내 버렸던 것이다. 그러자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 하듯이(왕상19.2) 헤로디아 역시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한다(19). 그것은 엘리야와 요한이 자기의 삶의 방식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헤로디아는 요한이 자기의 침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마음에 비수 같은 원한을 품고 기회만 엿보고 있다. 탐욕만 있지 꾀도 용기도 없는 헤롯이 그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세벨과 헤로디아가 음란의 대명사였다면 아합과 헤롯은 탐욕의 대명사이다. 음란한 헤로디아는 헤롯의 탐욕의 뿌리를 쥐고 헤롯으로 하여금 적그리스도의 자리에 취임하도록 한다. 헤롯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전령 세례 요한의 목을 베게 하는 것이다.

이런 탐욕과 음란이 함께 상승작용을 하면서 적그리스도의 일을 완벽히 꽃피우는 것은 빌라도의 재판정에서이다. 거기서 음란한 여인의 자리, 이세벨과 헤로디아의 자리에는 이스라엘이 들어선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라고 불리우기 위해 부름받은 이스라엘, 그 하나님의 신부가 가장 요염한 옷차림과 몸놀림으로 로마 앞에서 헤로디아의 딸처럼 춤추는 것이다. 음란한 이스라엘은 탐욕의 빌라도를 흔들어 혼을 빼 놓는다(눅23.23; 요19.12 etc.). 그러면 빌라도는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고 예수를 처형하는 것이다. 마치 헤롯의 눈이 살로메의 허리에 묶여 아차 하는 순간에 요한의 목이 쟁반에 올려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세상은 세상의 잔치에 하나님을 제물로 삼기를 원한다. 세상은 하나님의 피를 좋아한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곤 신의 축제에 삼손의 재롱을 보며 놀듯이, 아각 사람 하만과 그의 처 세레스가 잔치날 모르드개를 장대 위에 높이 달기를 원하는 것처럼, 헤롯과 헤로디아는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그들의 축제를 빛내고,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유월절이 아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되어 버린 그들만의 축제에서 예수를 발가벗겨 가지고 논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마음껏 멸시하고 죄인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장난을 치는 것이다. 음란한 이스라엘의 유월절 축제에 예수를 제물로 삼은 것이다. 이처럼 헤롯과 헤로디아와 요한의 이야기는 옛날 아합과 이세벨과 엘리야 이야기의 재판일 뿐 아니라 빌라도와 예수 이야기의 예고편이다. 최종 예고편인 셈이다.

아!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오로지 ‘회개하라’는 말 때문이다. 회개하라는 것은 자기 나라와 자기 땅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땅의 삶의 방식을 버리라는 말이다. 새로운 나라를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그 새로운 나라는 땅의 나라를 부정하는 것이요, 이 땅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 새로운 나라는 나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이요, 자신은 항복하고 새 나라의 주인, 새로운 나라의 통치자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다시 아! 이 회개하라는 말은 우리에게 있어서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흘러가는 구름 보듯이 볼 수 있는 말이 아니며, 지나가는 기차의 기적소리처럼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내게 들려 주시는 주님의 마지막 은혜의 말씀이요, 이 말은 성도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마지막 말이다.

헤롯과 같이 자기가 사는 곳에서 왕노릇하기를 버려야 한다. 자기 땅이 실은 하나도 없는데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아합은 자기가 왕으로 있는 땅이 자기 땅인 줄 알았다. 그래서 작은 나봇의 포도원으로부터 거절을 당하자 근심하고 답답해하고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이키고 식사를 아니 할 정도가 되었다. 이 아합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것이 회개하는 것이다. 주 안에서 주만 믿는 것, 그것이 회개이다.

엘리야와 같은 요한이 등장하면 그 시대가 옛날 아합과 이세벨의 시대와 같구나 종말이 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듯이(막 1.2-8), 세례 요한의 결국을 보면 예수의 결국도 알 수 있다. 예수의 결국을 보면 그 제자들의 결국도 알 수 있다. 오리라 한 엘리야 벌써 왔듯이 오리라 한 적그리스도 역시 이미 이 세상에 있다(요일 2.18,22; 4.3; 요이 1.7). 이 세상에 대하여 그리고 그 세상성에 대하여 회개하라 하면 이미 세상에 있는 적그리스도 그리고 적그리스도인 세상이 우리를 죽일 것이다.

마가복음은 세상에 의해 고난을 받고 죽음 앞에 직면하여 있는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 그렇게 돌아가셨으니 너희들이 가는 그 길이 헛된 길이 아니다 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은, 세상에 대하여, ‘세상아 너는 소망이 없다. 회개하라. 왕은 예수뿐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요한과 예수와 또 성도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성(worldliness)을 담대히 부정하고 주를 시인해야 한다. 이것이 회개이며 이것이 능력이다. 주와 함께 말하고 주와 함께 죽는 것 이것이 성도의 길이라고 마가는 외치고 있다. 이 능력이 교회에 있기를 원한다. 헤롯이 예수와 요한 사이에서 그런 공통점을 찾아냈듯이 헤롯과 같은 세상이 우리를 볼 때 또한 동일한 공통점을 찾아 낼 수 있기를 원한다. 세상으로부터 내침을 당하고 미움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공공한 삶이 세상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가 되어 울려 퍼지고 그리하여 세상은 우리를 인하여 고민하다가 헤롯과 이세벨이 요한을 죽이고 빌라도와 이스라엘이 예수를 죽인 것처럼 죽이려 할 때에 바로 그 때 우리는 예수의 제자로 발견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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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로되’ : 본 한글 번역은 א A C L Θ 0269 f1.13 33 M lat sy co 등의 사본의 지지를 받는 ἔλεγεν(3인칭 단수)의 번역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ἔλεγεν(3인칭 단수)이 된 것은 앞에 이미 나온 동사 ἤκουσεν(3인칭 단수 -(헤롯왕이) 듣고) 의 영향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는 비평과 함께 B (D) W 2427 pc a b ff2 vgmss sams 등의 사본의 지지를 얻어서 ἔλεγον(3인칭 복수)으로 읽는 경향이다. 영역도 KJV(1611), ASV(1901) 등 구번역본들과 NKJV 만 단수 3인칭(he said)을 취하는 반면 그 외 대부분의 현대 번역은 복수 3인칭 (people were saying -NASB, NEB; Some said -RSV; Some were saying -NRSV)을 취하였다.

이렇게 복수를 취하면 ‘이는 ~ 운동하느니라’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헤롯이 들었다고 번역할 수 있는데 그것이 8.27f.와 더 잘 어울리는 이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렇게 보는 것이 여기 14절의 본문 전후에서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소문이라는 문맥의 흐름과 잘 어울린다. 하지만 한글 번역과 같이 단수 3인칭을 취해도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마가복음 6:1 - 13] 예수와 제자 II, 이별 공식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 됨이뇨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 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7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10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 들어가며

이어지는 이야기는 ‘떠남’에 관한 것이다. 웬 이별? 그렇다. 이별은 이별인데 좀 색다른 이별 이야기다. 앞의 이야기는 다니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밑그림을 다시 그려보면, 6장을 여행의 방식과 여행자의 증거의 내용과 여행자의 운명 이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여행자의 운명에 관해서는 세례요한의 이야기에서 보게 될 것이고, 지금은 1절부터 13절을 본문으로 하여 여행의 방식과 여행자의 증거에 관한 이야기가 진행 중이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마가는 독특하게 예수의 나사렛 여행기사와 제자들의 여행기사를 붙여 놓았는데 이것을 우리는 지나칠 수가 없어서 그 문맥의 연속에 따라가며 생각해 보는 중이다.

그 세 가지 중에서 첫 번째인 여행의 방식을 굳이 나누어 본다면 그것은 다니는 방식, 머무는 방식, 그리고 떠나는 방식쯤이 될 것이다. 방식이라고 하니까 방법론을 이야기하려는가 할지 모르겠는데 그건 당연히 오해이다. 방법으로 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었더라면 오늘날의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오타가 아니다). 방법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따라 하면 뭔가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니시는 모습에서 드러나는 예수를 기억하고 또한 그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뜻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예수의 다니시는 방식과 제자들의 다니는 방식은 가히 무소유의 방식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아무 것도 가지고 다니지 못한 분이 제자들에게도 이르시기를 아무 것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 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러나 예수와 제자의 이 여행은 불교나 도교적 의미의 무소유나 무위도 아니요, 또한 그런 의미에서의 여행도 아니다. 주님과 제자의 무소유는 땅의 것의 무소유요, 땅의 것을 취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만의 무소유이지 하늘의 것까지 가지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다니며 전적으로 예수께서 하늘의 것으로 다니신다는 것을 배워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로부터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시고 오직 권세만을 주실 때 그 의미를 알았을 지도 모른다. 그 당시는 혹 몰랐다 할지라도 성령을 받은 후에 그들은 깨달았을 것이다. (cf. 요2.22; 12.16; 14.26; 16.4)

  • 본문

이제 여행의 방식 중에서 두 번째 이야기를 해 보자. 이 이야기는 이미 초두에 언급한 대로 떠남의 방식에 관한 이야기이다.

제자들은 예수로부터 또 무엇을 보고 배웠을까. 그들은 예수와 함께 다니면서 그 예수가 수없이 배척을 받는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예수의 모습 속에는, 모세로 말한다면,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하늘 만나를 양식으로 삼았던 그런 무소유의, 즉 하늘의 것만으로 다니는, 모세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동족의 구원을 위해 힘쓰다가 동족으로부터 배척받고 광야로 쫓겨가는 모세의 모습 역시 있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을 쳐죽이고 그것이 발각되자 광야로 도망하는 이야기에서,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것은 안 된다. 모세는 자기 힘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힘을 의지해야 했다’는 등의 교훈만 찾아내는 것은 너무 철없는 눈으로 구약을 해석하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예수께서 자기 동족에게 배척을 받고 죽음을 당하시는 일의 그림자와 자기 백성의 구원자를 배척하는 이스라엘의 반역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행 7.23ff.).

마가는 고난받는 예수, 쫓겨 다니는 예수, 결국은 죽음을 당하는 예수를 상세히 보도한다. 마가는 자기의 복음서 곳곳의 예수의 모습에서 선지자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오직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가고, 성령으로 이끌려 다니고, 세상의 것이 아닌 것으로 말하고 살고 가르치기에 세상으로부터 오해를 받고, 이리 저리 쉼 없이 옮겨 다니는 선지자의 모습 말이다. 예수는 실로 선지자처럼 살고 선지자의 일을 하고 선지자의 길을 가는 분이었다.

선지자의 말 중에는 자기 말이 하나도 없고 그의 입술에는 자기를 보내신 분이 그 입에 두신 말씀만 있다. 그의 입에는 하나님의 말씀만 있어서, 하나님을 떠나고 난 뒤에도 그런대로 그럭저럭 잘 살아가는 사람들을 적당히 봐 주지 않다. 선지자 예수는 멈추지 않고 말한다. 이 말 때문에 예수는 떠나야 하는 때를 곳곳에서 만나는 것이다.

너희에게는 영생이 없다. 생명은 내게만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희를 좋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떠났던 백성이 돌아오는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돌아와라.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내 말을 들을 것이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왜냐 하면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고 그래서 내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 내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땅 사는 일도 그만 두고, 집 짓는 일도 그만 두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도 그만 두라. 언제까지 그 일을 계속할 것이냐. 내 말/음성을 들어라. 돌아와라. 돌아오너라. 돌아와라. 돌아오너라.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빨리 그 소돔을 떠나라. 뒤돌아 보지 말고 와라. 급하다. 시간이 없다.

그리고, 거기를 떠날 때는 아무 것도 가지고 나오지 말아라. 발가벗고 나오너라. 빈 손으로 거기서 나오너라.

하나님의 백성만 하나님의 말을 듣다. 하나님의 백성만이 그 말을 듣고 하나님께 돌아온다. 돌아 올 뿐만이 아니라, 돌아 와서, 불러 주신 분께, 불러 주심이 오직 은혜였다고 은혜 주신 분께 감사하고, 날 부르시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질텐데 어찌 저 같은 자를 부르셨는가 하고 감지덕지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그 말을 듣지 않는다. 그 말을 듣지 않고 끊임없이 이렇게 말한다.

싫다. 싫다. 싫다. 결사 반대다. 돌아간다 해도 아직은 안 된다. 시집도 아직 안 갔고, 장가도 아직 안 갔고, 집도 아직 못 샀고, 자식 농사도 아직 덜 지었고 아들은 고등하고 3학년인데 아직 예수 믿을 정신이 없다. 소도 사야 되고 밭도 사야 되고, 바쁘고 바쁘다. 그런데 하나님께 돌아가면 소를 주나 밭을 주나 아무 것도 안 주지 않느냐. 싫다. 싫다. 싫다. 그만, 그만, 그마안!

싫다고 할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것을 모두 버리라고 하는 선지자 예수를 극도로 싫어한다. 이 싫어함을 당하시는 분이 예수다. 마가복음의 예수 이야기는 하나님의 것으로 내 보여 주다가, 즉 자기 자신을 증거하시다가, 그 선지자의 일로 고난을 받고 배척을 받고 끝내 죽음을 당하는 예수 이야기이다.

그가 배척을 받고 땅의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죽음을 당하는 이유는 다른 것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선지자처럼 하늘의 지혜와 하늘의 권능으로 가르치셨고, 그 지혜는 하늘의 지혜라서 세상을 ‘끊임없이-완전히’ 부정하는 지혜였기 때문이며 세상이 알지도 못하는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예수 자신을 증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선지자처럼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에서 배척을 받는 것이다.

배척을 받으면 예수는 떠난다. 떠나서 다른 곳으로 다른 마을로 가시는 것이다. 다른 마을로 또 떠나야 하는 것이 싫어서 부드럽고 듣는 사람이 듣기에 좋은 말로 말하지도 않고 듣는 사람이 듣고 싶어하는 말로도 말하지 않다. 배척을 하면 아 이 사람들은 나의 백성이 아니구나 하고 떠나는 것이다. 배척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함으로써 그들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떠나심의 방식이고 제자들이 예수로부터 배워야 했던 것이다. 예수는 어디든지 가고 어디든지 머무르고 어디든지 선지자의 말만 하고 그리고 배척을 받으면 또 어디든지 떠난다.

이 예수의 모습을 담은 사람이 제자이다. 제자들도, 어디든지 가고, 뉘 집이든지 머무르며, ‘예수의 말-예수’를 그 집과 그 마을에 들려준다. 그들의 말은 예수의 말이고 그들은 예수를 말한다. 그러나 어디서든지 그들을 영접하지도 않고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으면 그들은 예수가 떠나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떠난다. 그들은 예수로부터 보냄을 받았기에 예수가 가는 것처럼 가고 예수가 머무는 것처럼 머무르고 예수가 말하는 것처럼 말하고 예수가 떠나는 것처럼 떠난다. 이런 이를 제자라고 한다.

그 열 두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는 예수의 떠남의 모습은 그 제자들만의 것이 아니고 그렇게 떠나라 하신 말씀도 그 열 두 제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그 말씀은 교회에 하시는 말씀이다. 교회는 성도/제자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떠나시는 모습에서 그 어떤 두려움도 발견할 수 없었듯이 제자들도 떠나야 할 때에 두려움 없이 떠날 수 있어야 했다. 오히려 예수의 떠남과 제자들의 떠남은 그 마을과 그 집에 있어서 심판을 의미했다. 이 심판은 그 마을과 하나님 사이에 금을 긋는 것이다. 이 금을 긋는 일 때문에 예수와 그 제자들이 배척을 받고 또 다른 마을로 떠나야 했듯이 이 시대의 성도들 역시 예수 이름으로 금을 긋다가 그것 때문에 배척을 받는다. 예수 이름을 증거하는 것 때문에 그들은 떠나야 하는 때를 만나고, 떠나야만 하는 때를 만나면 그들과의 관계에 연연해하지 않고 떠나는 것이다.

  • 나가며

정리하자. 죽음을 당하신 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하나님이었다고 하는 것이 마가의 예수 증거이다. 마가의 독자들에게 예수를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 예수가 걸어 간 길을 보여주는 것이 마가복음의 기록 목적이다. 마가의 이, 고난 받고 죽음을 당하는 예수 증거는, 예수로 인하여 고난을 받고 예수로 인하여 죽음의 위협 앞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대로 위안이 되며 격려가 되고 확신이 되고 기쁨이 된다. 왜냐 하면 배척을 당하다가 결국 죽음을 당하는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예수와 함께 배척을 받고 예수와 함께 – 이 것이 ‘예수 이름으로’ 하는 뜻이다 – 죽음을 당하면 예수 이름 위에 두신 부활의 생명 역시 예수 안에 있는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가의 독자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마가는 예수를 증거하며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고난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 안에서 성도 역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안에 있으면 예수가 죽을 때에 함께 죽었다가 예수가 일어날 때에 또한 예수와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세상은 예수를 죽여도 죽이지 못했듯이 세상은 성도들 또한 죽여도 죽이지 못한다. 성도란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그러므로, 오늘날의 우리 역시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관계가 어려워질까 또는 내게 어떤 불이익이 오지 않을까 염려하며 예수를 적당히 감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 있는 예수를 노출시켜야 할 때 분명하게 노출시켜야 한다. 혹 우리가 바로 이 일 때문에 이미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해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마가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너희가 가고 있는 길은 헛된 길이 아니다. 너희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은 원래 예수의 것이다. 그 예수 이름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이 있음으로 해서 너희들은 예수의 제자인 것이다. 두려움 없이 말하고 떠나야 할 때가 되면 두려워 말고 떠나라 그것이 제자의 길이고 성도의 길이다.

[마가복음 6:7-30] 예수와 제자 I, 다니는 방식

7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10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14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 … 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 앞 문맥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한 이유는 그들이 생각하는 예수와 그들 앞에 서 있는 예수가 달랐기 때문이다. 랍비가 아닌데 랍비인 양 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고 선지자가 아니데 선지자 노릇 하는 것을 그들은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예수를 사람의 집 고치는 목수로만 알았지 하나님의 집을 지으시는 분인 줄 알지 못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한 것은 그들 앞에 서 있는 예수에게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기(사 53:2) 때문이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는 말씀처럼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그를 죽이기로 벌써부터 작정했고(3:6), 가족과 친척들은 그가 돌았다고 하고(4:13ff), 백성들도 제자들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며(4:10ff), 이제는 고향 사람들이 그를 배척한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 예수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8).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뜻 즉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고 백성에게는 미움을 받고 관원들에게는 종이 된 자를 왕 삼으시겠다는(사49:7) 하나님의 뜻은 점점 더 분량이 차가는 것이다.

거기서는 예수께서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으셨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다(5a). 이 말은 예수에게 권능을 행할 수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행할 수 없다는 뜻이라면 소수의 병인이라도 안수하여 고치는 일을 하실 수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5b). 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자 그들에게 더 이상 권능을 계속 행사하시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지금까지 견지해 오신 일하심의 원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자비는 예수를 의지하는 자의 몫이고 예수를 영접하는 자의 몫이고 예수를 믿는 자의 몫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사람은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다 구원하시지만, 말해도 듣지 않고 보고도 믿지 않음이 분명한,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이 분명한 자들에게 더 이상 하나님의 권능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연약한’ 예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요 1:12).

하나님께서 자기가 지으신 백성이 하나님을 배역하자 그 사람들을 인하여 한탄하신 것같이 예수께서는 나사렛 사람들의 불신을 이상히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백성을 버리고 새로운 백성을 만들어 가시는 것처럼 예수도 다른 마을로 떠나신다.

6절의 ‘모든 촌에 두루’는 ‘옆 마을들에, 주변 마을들에(around the villages < τὰς κώμας κύκλῳ)’의 오역이다. 아마 번역자들이 선교하는 일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던 것이 그대로 번역 속으로 들어 온 듯 하다. ‘예수께서 모든 마을로 다니시면서 선교하셨다 그러니 우리도 모든 곳으로 나가서 선교하자’는 뜻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예수의 선교는 모든 마을로 다니시는 선교가 아니었고, 말을과 마을로 다니시며 버리고 떠나는 선교였다. 예수는 그 마을에서 나오실 때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리고 나오셨을 것이다(11).

  • 본문

6장의 개요는, 예수의 나사렛 여행(1-6), 제자들의 여행(6-13),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회고(14-29), 그리고 제자들의 여행에서의 돌아 옴(30-31) 등으로 볼 수 있겠다.

이 본문들을 살펴볼 때 다음과 같은 것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첫째는, 예수께서 오고 가시는 모습과 제자들의 오고 가는 모습에서, 예수의 여행과 제자들의 여행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 둘을 관련지어 함께 생각한다는 것은 그 오고 가는 ‘방식’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둘째는 이 양쪽의 여행에서 예수의 자기 증거와 제자들의 예수 증거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인데, 그것은 그 증거의 ‘내용’을 생각해 보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첫째와 둘째는 즉 증거자의 행동(방식) 즉 여행방식과 증거의 내용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하나로 묶어서 살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예수 자신이 전하고 또 제자들도 전하는 그 예수의 결국과 운명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제자들의 여행 사이에 끼어 있는 세례요한 이야기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먼저 증거의 내용과 증거자의 행동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증거의 내용이라 함은 예수의 자기 이야기와 제자들의 예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고, 증거자의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의 오심과 떠나심, 그리고 제자들의 떠남과 돌아옴을 말하는 것이다. 이만큼만 운을 떼도 이미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청자/독자의 짐작과 나의 설명이 일치하는지 궁금하다.

제자들이 보냄을 받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7-31)가 예수께서 나사렛에 오셨다가 떠나시는 이야기(1-6) 바로 다음에 이어서 나온다는 것은 제자들의 여행을 어떤 관점으로 이해하고 읽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 흘려버릴 수 없는 것이다.

제자들의 여행기사가 예수의 나사렛 여행기사에 뒤에서 별 준비 없이 갑자기 나오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런 느낌을 따라, 마가가 연관성이 없는 기사를 별 의미 없이 배열해 놓은 것이 아니냐 혹은 그냥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냐 하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앞의 이야기 – 예수의 나사렛 여행 이야기 – 가 어떻게 뒷 이야기 – 제자들의 여행 이야기 – 를 준비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숙고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왜냐 하면 마가나 복음서 기자들 또는 성경 기자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생각나는 대로 나열하는 것만으로 자기들의 복음서를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제자들의 여행의 의미나 오가는 방식은 예수의 나사렛 여행 방식과 그 의미와 함께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결국 예수의 여행과 예수께서 제자들의 여행에 요구하신 말씀을 함께 살피는 것이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의 여행기사와 제자들의 여행기사가 함께 이어져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제자의 여행 방식과 예수의 여행 방식이 동질의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는 것이다. 여행방식의 어떤 부분이 동질이냐 하면 다니는 방식과 떠나는 방식이 동질이다.

먼저, 예수의 다님과 제자들의 다님의 동질을 주로 살펴보고 떠남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보기로 한다.

예수와 제자, 이 양자의 여행방식이 왜 동질의 것이냐 하는 것은 이 양자의 관계에 달린 것이다. 이 제자들은 그야말로 ‘예수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 말하는 모든 것은 예수로부터 배우고 받은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다니면서 그들의 선생 예수가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다니는 것을 배웠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 사람에게 속하지 않은 – 즉 하늘의 지혜와 권세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 외에는 가지신 것이 없었다(2b, 5). 나사렛 사람들의 말과 같이 예수는 사람으로부터는 배웠다고 할 만큼 배운 것도 없고 존경받는 직업도 가지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속한 하늘의 것 외에는 가진 것이 없으셨다. 예수는 두 벌 옷은커녕 있었던 한 벌 옷조차 사람에게 빼앗기신 분이었고(15:24), 말씀을 먹고 사시던 그의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는데 사단과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이었으며(마4:1ff. & par.; 요4:32,34), 그는 땅에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분이었는데 사람들은 그에게 두 발로 디딜 땅조차 허락하지 않고 결국은 땅에서 높이 들어 올려 매달았다(눅9:58; 막15:13ff.; cf. also 요3:14 and par.). 아들이 땅에서 들리자 아버지는 그를 하늘까지로 이끌어 올리고 무덤까지 비워서 아들의 생명도 아들의 거처도 땅에서는 찾을 것이 없다고 철저히 증거하셨다. 예수는 죽음조차도 땅의 것을 소유하지 못하신 것이다. 그의 죽음은 세상을 위한 죽음이었고 자기 백성의 죄삯을 대신 치른 죽음이었지 세상에 속한 죽음 – 인간의 죽음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 죽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53.10; 갈3.13; 엡5.2; 롬8.8; 히7.27; 9.25f.; 10.6ff.; 13.12; etc.).

땅의 것으로 살지 않고 땅의 것으로 죽지도 않는 것, 이것이 예수의 삶의 방식이며 예수 여행의 방식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도 이런 삶이 요구된다. 제자에게는 두 벌 옷도 필요 없고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도 요구되지 않다. ‘지팡이 외에는’ 하는 말씀이나 ‘신만 신고’ 하는 말씀은 필요 없는 것 이상으로 아무 것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지 ‘지팡이는 필요하다’ ‘신은 신어라’ 하는 말씀이 아니다. 그들이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은 예수께로부터 받은 것뿐이라야 하고 또 그 반대로 예수께로부터 받은 것은 반드시 가져가야 한다. 그래서 땅의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가진 것을 의지하게 되면 예수는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귀신을 제어하고 병자를 고치는 하늘의 권세를 받았다(7, 13). 제자들의 권세는 예수의 권세이니 드러나는 것은 예수이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일으키는 권능 행하심이 예수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니 제자들이 권능을 행하는 것은 제자들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왜냐 하면 그들이 받은 것은 원래 그들의 것이 아니라 예수께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권능 주신 것은 그들 자신을 자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권능을 주신 분을 자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권능을 주신 분을 자랑한다는 것은 손에 있는 것을 자랑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빈손으로 떠나라 하시는 예수 말씀의 의미이다.

그들의 여행이 땅에 속하여 살았던 어떤 사람을 전파하는 여행이 아니고 하늘에 속하여 사는 분을 증거하는 여행이기에 전파되는 것도 그분이지만 전파하는 모습도 그분의 모습과 같아야 한다.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가라 하시는 말씀이 이런 뜻이다. 그리고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제자들의 여행이다.

(비록 여기 이 열 두 제자가 성정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도 직능은 우리와 같지 않은 사도라서 적용에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원리로 교회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음은 분명하다.)

이 제자들의 여행이 그들의 평생 삶이 되었듯이 이제 성도들의 삶은 또한 이 제자들의 여행과 같이 되어야 한다. 이 제자들의 여행은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 준다. 이 제자들은 남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제자들이고 우리들은 우리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옳지 않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보내심’이 우리와 관계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다.

제자들을 부르시는 예수의 뜻은 이미 밝혀진 바 있다.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3:14f.)

예수는 자기의 영, 성령으로 성도들을 부르시고, 성령으로 부르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성도와 함께 하시고, 성령으로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성도들을 보내신다. 이렇게 성령으로 부름받고 성령으로 함께 하는 성도는 성령으로 살아간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족하고 모든 것이 가하다(빌 4:11-13). 예만 있고 아니오는 없다(고후 1:17-22). 철따라 입을 수 있는 옷이 없어도 족하고, 입맛을 따라가며 먹을 수 있는 먹거리가 없어도 가하다. 성도의 삶은 예수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삶이지만 그 예수만으로 족한 삶이다.

십자가 위에서 벌거벗은 채로 그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던 분이 말씀하셨다.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으로 양식을 삼으신 분이 말씀하셨다.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머리 둘 곳도 발 디딜 한 뼘 땅도 가지지 못했던 분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 14:1f.).’

부름받은 우리 역시, 다닐 때에는 이렇게 다니고 살 때에는 이렇게 살아야 하겠다. 어떤 예수가 우리를 불렀는지 기억해야 하겠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오직 예수의 권세와 능력과 자비로 살아야 하겠다. 예수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그것이 제자의 삶이요 십자가의 삶이다. 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우리가 성도라면, 예수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불렀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