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시편
주여 우리 무리를
| 작시 : 피득 A.A. Pieters 1898 작곡 : W. B. Bradbury 1858 곡조 : ALETTA 7 7 7 7 통일찬송가 47장에 실려 있는 [주여 우리 무리를] 이 찬송가의 가사는, 출판사에 따라 작사자 불명(Anon.)이라 표시된 경우도 있으나 많은 경우 작사자를 J. Burton으로 밝히고 있는데 실은 J. Burton의 것이 아니다. 가사는 시편 67편 전체를 운율에 따라 노래할 수 있도록 ‘한글로’ 가사를 지은 것인데 피득 선교사의 시편 이해와 압축하여 한글로 옮긴 솜씨가 뛰어나다. (피득 선교사는 한국 땅을 밟은지 오래지 않아 곧 선교사들 가운데서 최고의 한글 실력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제임스 게일, 그린필드 등과 함께 최초의 한영자전인 게일 한영자전의 증보판 작업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할 정도였다. 그에 대해서는 따로 올린 글 피득 선교사 행적 소고를 참조) 아래 시편 67편과 가사를 함께 묵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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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득(彼得 A.A.Pieters) 선교사 행적 소고
| 1895년 4월 7일 주일 아침, 일본 나가사끼, 한 교회의 주일 예배가 마친 시각, 낯선 청년이 독일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그 청년을 맞이한 사람은 당시 선교사로 와 있던 미국인 A.A.Pieters였다. 청년은 기독교 교리를 알고 싶어 했으며 곧 그와 함께 하는 성경 공부가 시작되었다. 며칠 후 청년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고 세례 받기를 원했다. 4월 19일, 2주만에 그 청년은 Pieters 선교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원래 청년은 남부 러시아 우크라이나 지방의 소도시인 Ecaterinoslav의 정통 유대교인 상인 집안 출생이었다. 거기서 김나지움(인문 고등학교)을 졸업하고 대학에서 독일 철학을 공부하였으나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며 집을 떠났었다. 철도 노동자 생활을 하며 시베리아를 횡단하고, 증기선 승무원 일을 하며 일본에 왔다가, 자신의 목적지를 미국으로 정하고 미국행 배가 있는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이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청년은 자신의 옛 이름을 버리고, 신앙 안에서 아버지가 되고 세례까지 베풀어 준 Pieters 선교사의 이름을 자신의 새로운 이름으로 삼았다. 그가 원래의 계획대로 미국으로 떠나려고 21일 출국을 기다리고 있을 때, 당시 미국성서공회 일본 주재 총무였던 헨리 루미스가 찾아왔다. 헨리 루미스는 그 청년(이하 Pieters)에게 조선에서 정식 권서인(勸書人 Colporteur)으로 일해 줄 것을 부탁했고 Pieters는 기쁨으로 수락했다. Pieters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러시아어 독일어 불어에 이르기까지 고전어와 현대어에 능통했으나, 한국에서 선교사들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 필수라고 할 영어는 구사할 수 없었다. Pieters는 영어를 배우면서 한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고 5월 16일 조선에 도착하였으며 곧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피득(彼得)이라는 한국 이름도 그때쯤 얻었을 것이다. 수개월 후 그는 혼자서 또는 동료 선교사 또는 한국인 조력자들과 함께 서울 근교와 시골로 다니기 시작했다.
때는 갑오경장, 동학혁명, 청일전쟁, 콜레라 만연 등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한 시기였다. 1 1895년 9월 2일 – 13일 12일 1895년 1차 권서여행 피득이 전한 성경은 한문 성경, 한문 현토 성경, 일본어 성경, 그리고 이제 막 나오기 시작한 한글 성경 등이었을 것이다.
한글 성경 번역의 초기 역사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중국에서 1882년부터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필두로 낱권으로 나오기 시작하여 1887년 완역된 로스 선교사팀의 「예수셩교젼셔」가 있고, 일본에서 1884년 출간한 이수정의 현토 한문 성경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있으며, 국내에서도 선교사들이 중심이 된 성경번역자회에서 1887년 「마가의젼복음셔언」를 시작으로 1900년 「요한믁시」까지 신약 전체가 모두 낱권으로 나왔다. 그러나 모두 신약이었고 구약은 최초의 기독교 신문인 「죠션크리스도인회보」에 조금 번역 연재가 될 뿐 개인이 소지하고 읽을 수 있는 책으로서의 구약은 전무하였다.
피득은 권서 활동을 하며 구약이 전무하다는 것에 늘 마음이 쓰였다. 정통 유대교인의 집에서 자라난 자신은 신약보다 구약에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히브리 성경을 날마다 읽고 암송하던 피득은 조선 사람들에게 구약을 읽을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이것이야말로 피득이 하고 싶은 일이었고 Pieters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피득은 시편을 번역하기로 하였다. 고난 중에 있는 조선 사람들이 위로를 얻을 수 있는 말씀이 거기 시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피득은 선교사들 사이에서 번역쟁이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위 표에서 보는 것처럼 피득의 권서 활동은 1897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확연히 줄어들었다. 시편 번역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피득은 1897년부터 시편 가운데 저주시들을 제외한 시편들 중 62편을 번역하여 1898년 10월 6일 감리교 삼문출판사에서 「시편촬요」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번역을 시작한지 1년만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조선 땅을 밟은지 3년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발행된 「시편촬요」는 수요를 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고 곧 매진되었다. 1906년 「창셰긔」가 나올 때까지 8년동안 유일한 구약이 되었다.
「시편촬요」가 나오던 1898년 그해 장로교 찬송집 「찬셩시」도 재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찬셩시」편집인인 G. Lee와 Mrs. Baird는 Pieters에게 시편찬송을 부탁하였고 「찬셩시」에는 시편찬송 14편을 비롯해 피득이 우리말로 작사한 찬송이 모두 17편이 실리게 되었다. 이 중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통일찬송가에는 4곡이 실려 있고, 신편 새찬송가에는 ‘내가 일심으로 (통일찬송가 17장)’이 빠지고 3곡이 실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피득이 초기 찬송가의 발행 대열에 합류한 것은 요청에 마지 못해 단회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말씀을 사랑했으며 조선을 사랑했고 또한 조선 사람들과 함께 주를 노래하는 일에 열심인 사람이었다. 1899년 피득은 권서일을 그만 두고 본격적인 선교사일을 하기 위해 미국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로 신학 수업을 하려 떠났다가 미국장로교 정식 선교사가 되어 1904년 9월 다시 한국 땅으로 돌아 온다. 다시 한국 땅을 밟은 피득의 일은 말로 형용하기 벅차다. 1904년에서 1911년 사이 그가 설립한 교회는 확인된 것만 10교회다. 그는 이 교회들을 걸어 다니며 세우고 걸어 다니며 돌보았다. 1904년 의왕시 鶴峴敎會(학현교회), 광주군 深谷敎會(심곡), 細谷敎會(세곡), 屯田敎會(둔전), 피득 선교사는 1906년 성서번역 위원회 정회원일을 맡았다. 전도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성경번역은 너무나 원하는 사역이었다. 신약은 1900년 완역되었고 1906년에는 공인되기까지 이르렀지만, 구약은 8년전 자신이 출간한 「시편촬요」외에 단 한권도 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피득은 구약 번역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사람중 하나가 되었고 5년만인 1911년 완간에 이르게 되었다. 찬송가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1905년 9월 감리교 선교사들과 장로교 선교사들은 숙원 중의 하나인 공용 찬송가를 내기로 합의했다. 1908년 무곡 찬송가는 그런대로 출판이 되었으나 1909년 곡조 찬송가를 출판해야 할 시점에서는 재정이 부족했다. 재정이 부족한 것이 알려지자 피득 선교사 부부는 사재를 털어 전액 부담하였다. 그리고 이 찬송가는 1931년 신정 찬송가가 나오기 전까지 무려 22년 동안 한국 교회의 찬송가가 되었다.
Sola Gratia! 오직 은혜입니다. 주님! |
시편 60편 [ 다윗의 좌절과 기도 ]
| [다윗이 교훈하기 위하여 지은 믹담, 영장으로 수산 에듯에 맞춘 노래,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 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염곡에서 쳐서 일만 이천인을 죽인 때에] 1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2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요동함이니이다 3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척거리게 하는 포도주로 우리에게 마시우셨나이다 4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셀라) 5 주의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6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7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홀이며 8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라 하셨도다 9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 10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11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12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심이로다 이 시편은 어떤 어두운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무엇인가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있고 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기도하는 이의 슬픔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로 하여금 패배하게 하였고 패배한 자는 참담함 가운데서 부르짖는 기도를 올립니다. 이 시편의 표제가 가리키는 상황이라 할 만한 곳은 두 군데가 있는데 삼하 8장과 대상 18장입니다(왕상11:14ff도 참조). 그 두 곳은 동일한 사건으로서 거기서 우리는 다윗의 ‘승리’한 결과 외에는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기사는 종국적인 승리만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이 다윗의 것이 분명하고 표제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다윗은, 종국적으로는 승리하였지만 아마 심각한 어려움에 빠졌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시편의 내용을 여호수아때의 전쟁과 비교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들이시기로 작정하셨고 실제로 그들은 입성하여 여리고까지 쳐부순 그 때 아간의 일로 인하여 실패를 맛본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때도 범죄로 인하여 실패하였지만 오늘의 이 시편에서도 하나님은 분노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에돔과의 전쟁에서 다윗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어는 본문에서 잘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이 일을 아뢰고 주의 싸우심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심각한 상황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1-5 : 1절과 2절을 보면 에돔으로부터 쫓기는 전장의 모습이 선연히 보이는 듯합니다. 그러나 에돔으로부터 도망하는 길은 작전상 일보 후퇴가 아니라 목숨을 건 도망이었습니다. 도망가는 길조차도 평탄한 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절감하리만큼 코에 단내가 나도록 도망가는 그 길은 염곡이었고 수시로 일어나는 지진과 지진으로 인해 패여진 구덩이와 함정은 그들로 하여금 포도주를 마신 것처럼 비틀거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6-8 : 다윗이 의지하는 것은 주의 약속이며 약속대로 해 오신 그분의 신실함입니다. 108편에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기는 하지만 실제로 6절부터 8절까지의 내용의 표현 그대로 약속을 하시거나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 다윗은 여기서 장소와 민족들을 들어서 그것들에 얽힌 지난 날을 회상하며 약속과 신실하심을 상기하여 거기에 기대 기도하려 하는 것입니다. 세겜과 숙곳은 야곱이 요단 강을 건너기 전과 후에 머물렀던 장소요, 길르앗과 므낫세도 요단 이편과 저편을 대표적으로 가리키는 상징어입니다. 유다와 에브라임은 하나님께 속한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고, 모압과 에돔과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대적자의 대명사입니다. 9-12 : 이런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약속을 상기하자 이제 다윗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 당연히 그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묻습니다. 하나님.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지요?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의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저희를 도우셔서 저희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 중에는 구원이 없나이다. 저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싸우겠사오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대적을 밟으시옵소서. 여기 앉아 있는 우리도 늘 잘못이 없을 리 없을 것입니다. 성도의 좌절감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진 느낌 바로 그것입니다. 그때 다윗의 싸움은 에돔과의 것이었다면 오늘날 성도들의 싸움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에 대해서 바울은 이미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12절을 보니 그때 다윗의 잘못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었음이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들의 잘못은 또한 무엇이겠습니까? 이 싸움을 홀로 다 싸워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옛날의 하나님과 이제 하나님은 다른 분이 아닙니다. 이 예수님이 바로 성도와 함께 싸우시고 성도를 그 손의 홀과 같이 잡으시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옛날의 주와 오늘날의 주가 다른 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이 여호와 경외로 인하여 승리하였듯이 이 예수께서 홀로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이제 성도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주 안에 태어난 새로운 이스라엘이요 그의 군사라면 하나님을 경외하여 마지 아니하셨던 주 안의 사람처럼 또한 주 경외하는 법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
시편 59편 [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
| [다윗의 믹담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 1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2 사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3 저희가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범과를 인함이 아니요 나의 죄를 인함도 아니로소이다 4 내가 허물이 없으나 저희가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사 감찰하소서 5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일어나 열방을 벌하소서 무릇 간사한 악인을 긍휼히 여기지 마소서(셀라) 6 저희가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7 그 입으로 악을 토하며 그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하나이다 8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 9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니 저의 힘을 인하여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10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내 원수의 보응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시리이다 11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저희를 흩으시고 낮추소서 12 저희 입술의 말은 곧 그 입의 죄라 저희의 저주와 거짓말을 인하여 저희로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13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셀라) 14 저희로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15 저희는 식물을 위하여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 16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17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이 59편의 표제를 우리가 그대로 받아 드린다면 이 59편의 배경은 사무엘상 19장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달리 이 내용의 배경을 찾아 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군장이 되어 그의 딸 미갈과 결혼하였고 결혼한 후에도 여전히 블레셋과 싸웁니다. 다윗이 크게 이기자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는데 다시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다윗이 자기 집으로 도망을 간 것이나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사람을 보내어 밤새 지키다가 왜 아침이 될 때에 죽이려 하였는지 등등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다윗이 도망한 때나 사울이 사람들을 보내 다윗을 잡으려 한 때가 밤중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 시절 다윗은 나가서는 싸우고 돌아 와서는 수금을 타야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약속된 왕국은 아직 멀고 사울의 힘은 수그러드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에도 사울의 창에 맞아 죽을 뻔한 일이 있었지만 오늘같이 도망까지 가야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습니다. 정말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음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집으로 숨어 들어와 움츠러드는 가운데 있었지만 다윗은 절망 속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의 힘과 구원과 능력은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음 상기했습니다. 들에서 사자로부터 양을 지켰을 때도 그렇거니와 골리앗과 싸울 때는 더욱 그랬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의 노래는 서정이 넘치는 노래일 수는 없었습니다. 노래는 간절할 수밖에 없었고 그 절규같은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건지소서 오 하나님이여!’ 그러나 이렇게 구원을 절규할 수밖에 없게 하는 지금의 이 고난은 다윗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고난은 의인의 고난을 즐기는 사람들 때문입니다(2). 또한 그 고난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셔서 다윗의 나라로 사울의 나라를 바꾸려 하시고 그를 사울의 옆에 갖다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개인적인 것 같은 질곡 속에서 개인적인 감정으로만 노래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사무엘은 전에 이새의 집으로 가기 전에 그 집에 왜 가야 하는지를 하나님께로부터 들었습니다(삼상16:1b). 다윗 또한 아무런 이야기 없이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을 리 없을 것이고 오가는 이야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혹 이야기가 없었을지라도 구약의 이스라엘 사회에서 기름부음의 의미를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 속에 새로운 이스라엘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사무엘이 전에 기름 뿔을 취하여 그에게 부었던 의미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의(1) 하나님은 나의 개인적인 하나님이 아니기에 사실은 이스라엘(5)의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나(9)의 산성이시지만 그 하나님은 나 개인의 피난처가 아니라 ‘우리(11)’의 방패라고 부를 수 있었고 나의 ‘백성(11)’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사울 역시 다윗의 개인적인 원수가 아닙니다. 그가 다윗 개인의 원수가 아니기 때문에 사울과 사울의 왕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반대하는 열방과 같은 것이며 블레셋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과 사울의 군사를 보고 열방(5,8)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열방과의 전쟁은 분명히 ‘나’의 전쟁이 아니기에 전쟁하시는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5)’를 불러 그에게 나의 전쟁을 위탁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승리하시고 그의 능력이 땅끝까지(13) 드러나는 것을 소망하며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비웃으시는 때를 바라봅니다(8). 다윗은 건지시고(1,2) 높은 곳으로 들어 올리시고(1)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1). 다윗이 높이 들려 올라가기를 원하는 장소는 산성인데 그 산성은 어떤 지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곧 하나님입니다(9).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산성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면 다윗의 원수는 다윗에게 이를 수 없습니다. 사악을 행하고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가 강한 힘으로 다윗에게 돌격할수록 다윗의 기도는 더욱 멈출 수 없습니다. 원수는 지금 밖에 어두움을 틈타 먹이를 노리는 개처럼 다윗의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과 같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말하며 칼같이 잔해하는 말로 교제하며, ‘우리 말을 누가 들으리요, 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리요’ 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죄라서 말은 곧 죄가 되고 저주와 거짓말,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교만뿐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기도가 하나님께 이르면 하나님은 다윗을 영접하고 다윗의 원수에게 돌아 갈 보응을 하나님께서 신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낮추시고 진노하시고 소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그 나라를 폐하고 다윗의 나라를 일으키시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모든 백성이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지식은 사울에게 속하였던 자들뿐만이 아니라 사울과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모든 사람 모든 나라가 알게 되어 땅끝까지 그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13). 이 하나님의 보응하심괴 보호하심을 다윗은 믿고 있기에 이렇게 기도하고, 기도는 오히려 기쁨과 즐거움의 빛까지 띠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힘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노래는 오직 주의 힘입니다. 개같은 원수는 저희의 식물을 위하여 애쓰지만(15) 다윗은 주께 찬송하고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릅니다(16). 다윗의 환난날에 피난처는 오직 주님이시고(16) 하나님의 긍휼만이 나의 산성이며 산성이기 때문입니다(17). 다윗이 부르던 하나님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친히 고난을 당하시고 친히 싸우시고 그리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오신 그를 반대하였고 시마다 때마다 트집잡고 잡아 죽일 구실만을 위하여 지켜 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고소하는 그들을 향하여 이 사람의 피를 누가 책임지려느냐 물었을 때에 그들은 오늘 다윗의 대적자들과 같이 교만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찌어다 그들은 예수를 죽였으나 하나님은 그를 살리셨고 만주의 주로 만왕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돌아가실 때 죄패 위에 분명히 써 있었던 것처럼 그는 진실로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사울의 왕국이 다윗의 왕국을 소멸시키지 못한 것처럼 세상의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죽인 아들을 하나님은 살려서 아들을 죽인 자들을 비웃으셨습니다. 아들 예수는 돌아 가시기 전에 기도하실 때마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에 기대어 기도하셨음이 틀림없습니다. 마지막에 기도하실 때에, 다윗이 개인적인 구원을 소망하며 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기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고 그 새로운 백성들에게 제자들에게 늘 기도를 가르치실 때마다 먹고 입는 것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언젠가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였던 것과 같은 심정과 담대함으로 대적자를 질타하는 자였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역시 아버지의 생명력으로 아들을 살리심으로 죄와 사망을 질타하였습니다. 이제 성도는 이 아들 안에서 아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생명 아들의 생명을 입고 십자가 군기를 앞세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들도 예수 안에 사는 사람처럼 생명의 성령으로 사는 사람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시절임을 모두가 절감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IMF나 그런 것이 우리의 어려움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대적은 그런 것들을 빌미로 우리 안에 계신 주를 믿는 믿음으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무릇 다른 그 어떤 것보다 마음을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그 무엇보다도 기도하기를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사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고 그 믿음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너희들 마음대로 해 봐라 내게는 하나님이 계시니 너희가 여호와 하나님과 싸워 이길 수 있을진대 나를 이길 수 있으리라. 밥을 못 먹어도 좋다. 이혼을 당해도 좋다. 쫓겨나도 좋다. 매를 맞아도 좋다. 주님의 나의 생명이니 그 누군가 나의 목숨을 끊을들 그것이 어디 나의 생명을 앗기는 것이 되겠으며, 그 무엇이 나를 핍박한들 그것이 나를 삼킬만한 슬픔으로 몰아갈 수 있겠느냐’ 하며 담대하십시오. 담대함으로 사십시오. 그 담대는 오직 주를 믿는 믿음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날들을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만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성도의 산성이 다른데 있지 않고 오직 거기에 있습니다. |
시편 58편 [ 하나님의 복수 ]
| [다윗의 믹담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1 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 잠잠하느뇨 너희가 정직히 판단하느뇨 2 오히려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의 강포를 달아주는도다 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 저희의 독은 뱀의 독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같으니 5 곧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할지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6 하나님이여 저희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7 저희로 급히 흐르는 물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살이 꺽임 같게 하시며 8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기되지 못하여 출생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9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더웁게 하기 전에 저가 생 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시리로다 10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11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다윗이 어떤 상황에서 이 시를 지었는지는 다만 이 시편의 내용을 살펴 봄으로써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지 확실한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의인으로 그리고 그 상대편을 악인으로 부르면서 악인의 행위와 그 마음을 고발하고 하나님께 신원하며 결국 하나님께서 의인된 자신의 신원을 들어 주실 하나님의 공위로우심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노래입니다. 표제에서 믹담시라고 하는 것은 신비시라고 번역할 수 있으며, 분명치는 않지만 대체로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 정도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공연히 불평스러운 언어를 내뱉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께 불러 아뢰는 마음을 생각하시면서 신비라는 말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알다스헷이라는 말도 우리는 잘 알 수 없는 말입니다. 그 의미는 ‘멸망하지 말라’라는 정도의 뜻이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 곡조명이라는 것입니다. 표제를 우리가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시편 58편은 번역과 이해에 난점이 많은 시편입니다. 그러나 한 두 단어나 몇 마디 말의 정확한 쓰임새를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의미와 교훈까지 놓쳐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이 시편을 생각해 봅시다. 1-2 : 먼저 다윗은 공격적으로 노래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공의를 말하고 있느냐, 너희가 정직하게 판단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표현을 보건대, 공격을 당하는 자는 공의를 말해야 하는 자리에 있었고 또한 정직히 판단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을 것이므로 그는 상당한 위치에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1절의 초두에 나오는 인자는 그냥 보통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번역에는 누군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인자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지만 원래는 두 번 나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찌’라는 말은 원래 없거니와 ‘잠잠하느뇨’하고 번역된 말(מלא)이 또 그 하나입니다. 이 말은 침묵, 또는 잠잠함의 의미로 번역할 수 도 있지만, 권세자, 귀족 등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렇게 번역한다면 다윗의 책망은 말해야 하는 자가 말하지 않는 침묵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기는 말하는데 거짓으로 말하는 것에 대한 질책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는 것은 2절과 3절의 내용과도 조금 더 잘 어울립니다. 2절을 봅시다. 정직히 판단하고 공의를 말해야 하는 자는 오히려 전적으로 그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마음도 손도 악합니다. 마음으로는 악을 행하며 손으로는 강포를 행합니다. 결국 1절과 2절에서 이 악인은 말과 마음과 손이 일치하여 공의와 정직을 부정하고 자비를 버린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공격을 받고 있는 이 악인들이 사울의 참모들이나 조언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칼빈, 류폴드). 알다스헷의 곡조로 묶여 있는 세 편의 시편 57,58, 59 중에서 앞 뒤 두편이 사울과의 관계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고, 1절과 2절은 직접적인 사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면(복수이기 때문에), 그 사울과 동류가 된 사람들로 볼 수밖에 없고, 그들이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사울 측근에서 사울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3-5 : 다윗은 그들의 총체적인 행악을 보면서, 그들이 악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원래부터 악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행악하는 것은 원래부터 이제 다윗으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아니요, 애초부터 다른 나라 사람인 것이 드러난 것이라고 합니다. 전혀 다른 나라 사람이므로 의인의 말은 들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 아래 출생하여 죄 아래에 멸망해 갈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인생입니다. 악인은 어금니 아래에 독을 가득히 물고 있는 귀머거리 독사와 같습니다. 귀머거리이기에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뱀을 부리는 자가 온갖 음률로 들려주고 무릎을 흔들며 피리를 흔들어도 귀머거리가 된 독사는 오직 냉담하고 모든 생각은 자신의 어금니 아래에 있는 독액에 머물러 있습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한다는 말씀이 바로 이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아무리 정의가 그들의 귀에다 대고 외치고, 공의가 그들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의 입에서 나오느니 공의가 아니며 판단은 정직이 아니었습니다. 6-9 : 그래서 다윗은 이 일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들의 멸망을 하나님께 의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원통함을 풀어주십사 신원합니다. 원수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상은 다윗을 늘 붙들고 있습니다. 이 악인들의 행악을 날려 버리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도 그들의 행악도 아무것도 아님을 드러내시라는 기도로 계속 이어 합니다. 독사의 독니를 빼버리시고 사자의 어금니를 빼버리소서. 10 : 10절에 이르러 다윗은 기어코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는데 다윗은 그 본심이 하나님의 이름에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진멸당하는 악인의 흘리는 피에 의인의 발이 젖는 때 바로 그때가 의인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때입니다. 다윗이 지금 여기에서 의인이 악인의 보복당함을 보고 기뻐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적인 복수심과 그 통쾌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보상 즉 정직으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면 그것은 곧 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이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2절에서 악인은 중심에 악을 행하며 손으로는 강포를 행한다고 했습니다. 악의 반대말이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일진대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며, 강포의 반대말은 자비일진대 참 자비를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공의를 말하는 것은 다윗이 옳다,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이 옳다고 하는 것이고, 정직한 판단은 사울의 왕국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상태를 고집하며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부정하고 그 나라의 왕을 잡아 죽여야 할 자로 정하는 것은 먼 옛날 사울과 다윗의 시절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를 참람하다 하고 죄인들 사이에서 못박아 버린 이야기를 미리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사울을 폐하고 다윗을 세우셨듯 아버지께서 결국 의인 예수를 살려 만주의 주로 삼으셨습니다. 다윗의 고난이 하나님의 승리로 나아갔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었고 아버지께 영광이었습니다. 새롭게 탄생한 다윗나라의 백성들은 다윗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나라 안에서 살게 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기도와 그분의 십자가로 살게 된 사람들입니다. 여기 이 시편의 다윗은 성도의 모범이 아니요, 영웅적인 믿음의 사람을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새로운 나라의 왕으로서 등장한 사람입니다. 다윗을 보면서 영웅적인 믿음의 생활을 하는 성도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오실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우리도 다윗같이 기도 잘 하고 우리도 다윗같이 고난을 이겨냅시다’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원수갚는 것과 생사를 아버지의 손에 맡기고 그렇게 기도하기를 마지 아니하셨던 예수, 그 분 안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공의와 정직이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때는 다윗을 대적하고 다윗의 길을 막는 것이 공의를 버리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 아니라 할 때마다 공의를 말하지 않는 것이 되고, 그때는 다윗을 부정하는 것이 부정직이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가 아니라 할 때마다 정직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성도,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이 아들만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셨으면 그 안에 있는 자들도 함께 살리심을 입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고백으로 공의와 정직 가운데 머물러 사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의 이 진리를 늘 기억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













언제나 사람을 생각하는 일은 조심스럽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라 하셨으니 피득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감사함으로 받고 또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피득 선교사의 발자취를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조선 땅에 열어 주신 은혜의 발자취도 함께 생각하게 되었다. 피득 선교사에게 감사하고 피득 선교사를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