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구약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은혜로‘ 부름을 받았으나 믿음 없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가
은혜로믿음 있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

아브라함은 잘 봐주어도 제로섬이다.
오롯이 드러난/남은 것은 은혜(뿐)이다.

요나서 정리

선지자는 말로 말할 뿐 아니라 호세아처럼 행위performance로 말하기도 한다. 이 요나서의 요나 역시 그와 같다.
복음서에서 예수를 가리켜 “이 사람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한 세례 요한이 ‘인간으로 나타난 구약’인 것처럼, 요나서의 요나는 한 개인화된 이스라엘이다. 그리고 요나의 행적은 이스라엘의 역사의 행적이다. 구약성경 어디를 잘라보아도 그 단면도는 요나(서)이다. 요나서의 요나는, 배역과 불순종의 길을 걸었던 이스라엘의 걸음을, 요나서 전체에 걸쳐서 재연해 보여준다. 요나서의 요나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는 메시야 외에는 이스라엘에 소망이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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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의 부름받은 요나는 부름받은/구원받은 이스라엘이다.
야곱의 아들들/이스라엘은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고 이웃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이 애굽에 내려가게 된 것은 기근때문이 아니라 동생을 들에서 돌로 쳐죽인 가인의 범죄를 자기의 것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요나가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것처럼 야곱도 내려가고(37:35) 유다도 내려간다(38:1). 요나는 둔감하지만 뱃사람들은 민감한 것처럼, 유다는 둔감하지만 이방여인 다말은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든다.

2장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여호와께 돌아옴은 거짓이다. 그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돌아옴이 굳세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구원해주시는 여호와를 향해 자주 기도하고 회개하고 감사한다. 하지만 그 모든 선한 것들은 또한, 감사의 노래를 장송곡 tune인 키나에 얹어 노래하는 요나의 노래처럼 언제나 불안하다.
이스라엘의 회개가 만족스럽지 않아도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회개의 무늬만 있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신다. 부르짖고 회개하는 이스라엘을 애굽이 토해내는 것처럼 큰 물고기도 이스라엘을 토해낸다.

3장의 요나는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구원받은 이스라엘은 아주 잠시만 그리고 아주 소홀한 자세로 하나님을 섬긴다. 그와 같이 요나도 아주 불성실하게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한다. 배의 선원들이 민감했던 것처럼 니느웨 사람들도 더 없이 민감하여 구원을 얻는다. 니는웨의 구원을 보고 이스라엘이 배워야 하는 것은 니느웨를 질투하고 자기들도 회개하는 것이었다.

4장의 요나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기를 쓰고 아론과 모세에게 대들었던 것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하나님께 대든다. 니느웨가 구원 얻는 것을 보는 즉시 격렬하게 진노하는 요나는 자기 배만 섬기는 이스라엘의 완성형이다.
요나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가 아니라, ‘우리에게만 임하는’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이다. 이스라엘이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인 것처럼 요나가 원하는 것도 다른 것이 아니다. 요나가 원하는 것은, 하나니의 뜻이야 어찌 되었든간에 관계없이 자기 나라가 잘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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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先知者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地境을 恢復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苦難이 甚하여 매인 者도 없고 놓인 者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者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塗抹하여 天下에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救援하심이었더라(왕하 14:25-27)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富大하고 潤澤하매 自己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自己를 救援하신 磐石을 輕忽히 여겼도다(신 32:15)

아밋대의 아들 요나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북이스라엘 여로보암II의 제위기간 41년(786-746)은 이스라엘 최전성기라 할 만한 시기였지만 실상은 은혜를 입어 튼튼해진 것을 알지 못하고 교만하기만 한 악독한 세대이다. 요나서는 이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요 최후 통첩이다. 이것이 요나서의 목적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한 세대쯤 후인 bc722년에 멸망한다. 살찐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은 멀리 있었다.

나아만 장군과 떠오른 도끼(왕하 5: – 6:7)

나아만 이야기(5장) – 실은 이스라엘 이야기 – 는, 마태복음이 헤롯으로 시작하여 빌라도로 끝나는 것처럼, 문둥병으로 시작하여(1) 문둥병으로 끝난다(27). 문둥병 – 불가항력적인 부정 – 은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요청이거나(나아만)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받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게하시). 이 이야기는 이방인 나아만의 은혜입음과 신앙고백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책망하면서 동시에 게하시의 탐욕을 들어 ‘이스라엘 왕의 탐욕’을 책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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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만이 존귀한 까닭은 그가 자기 나라에 구원을 주었기 때문인데, 그 구원은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이다(1). 열왕기 기자는 나아만이 여호와를 힘입어 자기 나라에 구원을 주었다고 말하면서,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이 그 의지하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면, 하물며 이스라엘 왕이 여호와께 의지하면 얼마나 더 힘이 되시겠는지 알아야 한다고 독자에게 말한다. 왕이 끝내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라도 패망하고 말 것이다.

왕의 이름이 여호람인 것을 독자마다 밝히 알지만 그 이름을 말하지 않고 ‘이스라엘 왕’이라고 부르고 마는 것은, 이 원리가 여호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왕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사 역시 동일한 목적에 의해 그 이름 대신 선지자, 하나님의 사람 등으로만 불린다.

이스라엘 왕이 나아만을 대면하는 시간은 이스라엘왕 자신의 정체와 방향을 드러내야 하는 결정적 시간이다. 나아만이 왕 앞에 와서 당신에게 또는 ‘당신의 나라에 여호와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자 ‘내게는 여호와가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옷을 찢음은 여호와의 신성이 침범되는 참람한 상황 앞에서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이스라엘 왕은 자기 옷을 찢으며 가장 경건한 언사를 내보이지만 실은 불신과 분노의 표현일 뿐이다. 엘리사는, 나아만을 가리켜 ‘저가’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는 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실로 알아야 하는 자는 나아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왕이다.

나아만은 엘리사를 만날 필요도 없다. 한 백부장이 예수께 고백한 것처럼(눅 7:1-10), 나아만이 만나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말(씀)’이다. 더 깨끗한 물도(12) 마술도(11)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믿음과 순종이다. 믿음은 말하는 자의 말을 믿는 것이고 순종은 말하는 자의 말을 따르는 것이다. 이 외에는 정결로 ‘돌아’ 올 길이 없다. 그 길의 구체적인 내용은 오직 하나님께서 정한 곳(요단강)과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일곱 번 씻음)이다. 거기에만 ‘돌아’(10, 14; 여전-) 오는 길이 있다.

죽었다가 사는 세례를 철저히(일곱 번 10, 14) 받아들임을 통해 정결/부활을 입은 나아만은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던 길로부터(12) ‘하나님의 사람’에게 ‘도로’ 와서(15) 신앙을 고백한다.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 아나이다’ 이 신앙 고백은 원래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왕의 것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단코 예물을 받지 않는 엘리사로부터 은혜는 갚을 길이 없는 것이라는 사실, 또는 하나님의 선물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15-16, cf.행 8:18-21). 그에게 남은 것은 이스라엘에만 계신 신을 경배/사모하며 사는 것과(17) 일상 속에서 계속적인 사유하심을 바라는 중에 고난의 시간을 통과하며 사는 것 뿐이다(18).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평안히 가라’고 한다(19). 고난이 있다고 평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만을 믿게 된 나아만 앞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게하시가 등장한다. 게하시는 항상 말씀을 들을 기회 속에 그리고 약속의 땅에 살지만 참으로 귀하게 여겨야 하는 율법과 약속을 잃어버린, 탐심으로 자신을 채운 이스라엘(왕과 백성)의 전형적 알레고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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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가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고 받지 않았던 것을 게하시는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고 받으려 한다. 나아만의 관심은 평안이다. 게하시는 평안으로 답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은 한 달란트를 말하는 게하시에게 두 달란트를 건냄으로써 나아만은 자신이 오리를 같이 가달라는 사람에게 십리를 마다 않는 사람임을 드러낸다. 게하시의 숨긴 탐욕도 드러난다. 엘리사의 책망은 엄중하다. 이스라엘이 망해가는 지금은 재물 – 자기 생명의 시인 – 을 구해야 하는 때가 아니라 은혜 – 하나님의 생명의 시인 – 를 구해야 하는 때다. 나아만의 문둥병은 게하시에게 마땅하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자마다 부정하다.

게하시의 부정은 게하시의 불가항력적인 무능이다. 게하시-이스라엘에는 승리가 있을 수 없다. 앗수루의 침공 –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 – 앞에서 이스라엘(집)의 승리(보존 혹은 재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엘리사-여호와(의 동행) 뿐이다. 이어지는, ‘물 위로 떠오른 도끼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독자에게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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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와 함께 하지 않는 무리-이스라엘은 영성(零星)해지지만 엘리사와 함께 하는 무리 – 헌 이스라엘 속의 새 이스라엘 – 은 번성한다(1). 새 이스라엘에게는 새 집이 필요하다. 물론 그 새 집은 엘리사 – 하나님의 사람 – 과 함께 하지 않으면 가능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다(2-3).

새 집을 짓는 사람은, 집 짓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을 회복하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능력 바깥에 있고,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사건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해결할 수 없(기에 문제)다. 문제의 시간은 하나님을 불러야 하는 것을 기억나게 하는 은혜의 때다. 가장 사소한 것은, 잃어도 사소한 것이고 회복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인 만큼 회복도 불가능하다. 도끼는 물에 빠지고 되찾을 길도 되갚을 길도 없다 – 그래서 집도 지을 수 없다 -. 그때는 아아! 하고 외쳐야 한다.

엘리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가장 사소한 것을 물 위로 던지고 가장 무거운/소중한 것을 취하는 광경을 모두가 보게 한다. 건져 올린 것은 도끼이지만 이스라엘이 – 그리고 독자가 –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엘리사-하나님’이다. 엘리사가 아니면 집을 지을 수 없다. 이스라엘(왕과 백성)이 배워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이, 또는 그 정도를 훨씬 넘어, 친히 이스라엘(집)이신 – 친히 성전이신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배워야 한다. 그 외에는 집(으로의 길)이 없다.

히스기야의 기도 [열왕기 20]

  • 1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들었다. 히스기야는 드물게 훌륭한 왕이지만 영원한 왕은 아니다(1). 왕이 영원하지 않음은 ’이스라엘에!’ 최고의 위기이다. 영원한 왕은 아니지만 훌륭한 왕인 히스기야는 기도한다(2). 기도의 내용은 히스기야 자신의 행함을 기억하시라는 탄원이다(3).

히스기야의 이 행함들은 히스기야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운명이다. 히스기야가 훌륭하면 이스라엘도 훌륭하고 히스기야가 살면 이스라엘도 산다. 히스기야의 통곡은 자기 죽음을 보는 통곡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는 통곡이다. 히스기야가 죽으면 이스라엘도 죽기 때문이다. 선한 왕이 길이 살아야 이스라엘도 길이 산다.

  • 2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를 여호와께서 듣지 않으실 리 없고 그 응답은 신속하다(4). 이스라엘의 왕 다윗에게 언약을 주신 여호와의 응답은 ‘히스기야의 부활’이고, 3일만에 부활한 히스기야가 할 일은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것’이다(5).

히스기야에게 여호와의 전은 ‘이스라엘을 위한’ 신탁을 구하고(19:1ff.),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를 올리는 곳이다(19:14ff.). 안타깝게도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더 기도할 수 있도록 허락된 기간은 15년뿐이지만 그래도 그 동안만은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보호하심 아래에 있다(6). 히스기야의 슬픔은 이스라엘과 관계없지 않다(7).

  • 3

히스기야는 이스라엘의 건강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하여 징조를 구한다(8). 징조는 불가능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좋은 것이다. 징조가 불가능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성취가 확실해진다(9-10). 일영표의 해그림자가 뒤로 물러갔다(11).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만큼 히스기야의 부활은 확실해졌지만 그의 부활은 15년짜리이다. 히스기야가 사는 날동안만 이스라엘에 태평과 진실이 있다(19).

  • 4

때가 차매  히스기야가 왔고 그는 자신의 몸에 징조와 성취를 함께 가지셨는데 죽었다가 3일만에 ‘놀랍게도!’ 부활하여 ’영원히!’ 계심으로써, 히스기야와는 달리, 새 이스라엘에 영원한 평화를 주셨다.

  • 긴 글이 부담스러운 분들을 위한 친절한 요약

히스기야의 기도는 히스기야 개인/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다. 교회와 공동체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이다. 이사야에서는 그것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펼쳐 놓고,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시니 믿고 열심히 기도하여 응답받자고 설교하지 말자.

생명의 주 엘리사(왕하 2:15-22)

엘리사의 첫 일은 여리고를 저주에서 풀어낸 일이다. 여호수아가 묶은 것을 얼마 전에 히엘이 풀려 했으나 풀지 못하고 엘리사가 푼다. 신탁은 임의로 풀 수 없는 것이다. 신탁은 신탁을 내린 신령과 동일한 신령의 임자만이 풀 수 있다. (반대로, 신탁을 풀거나 성취하는 사건은 처음의 신탁자와 동일한 신령을 받았음을 증거하는 증빙이기도 하다.)

엘리사의 첫 일이 500년 동안 죽어 있던 여리고를 살리는 일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엘리야는 생명이 있는 채로 별세하여 이스라엘의 소망이 되었지만 엘리사는 그 소망을 이 땅에서부터 구현해야 하는 것이라고 알린다. 그렇게 생명의 권능을 받는 엘리사는 살리는 일을 하다가 죽을 병이 들어 죽게 되는데, 그러나 이미 생명의 성령의 옷에 둘린 그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일 역시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13:20-21).

죽음의 물이 흘러 열매 – 생명의 결실 – 이 없는 도성에 생명의 물이 흐르면 마시고 먹을 수 있는 도성이 된다. 여리고가 그렇게 된 것처럼 이제는 이스라엘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이 생명의 사역자 엘리사를 받아들이면 이스라엘 전체가 사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그 일을 위해 이제 엘리사는 벧엘로 간다.

벧엘에도 선지자의 생도들이 있기는 하지만 현 이스라엘 정신의 중심으로서의 벧엘은 금송아지가 통치하는 곳이다. 거기는 금송아지가 아니면 대접을 받지 못한다. 어린 아이들도 엘리사를 조롱한다. 엘리사를 조롱함은 하나님을 조롱함이다. 하나님을 조롱하다 죽은 아이들의 숫자는 공교롭게도 42명인데 이는 가까이는 사나운 예후에 의해 수행된 오므리 왕조의 파국의 전조가 되고 (10:14; cf.17:26), 멀리는 결국 파국을 맞을 세상 시간의 운명을 내비치는 것이다(계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