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의 성탄 기사

[1:1] 구약은 아브라함에게도 자손을 약속하고 다윗에게도 자손을 약속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자손은 백성이며 다윗에게 약속된 자손은 왕이다. 예수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하는 것은 이 예수가 백성 약속의 성취임과 동시에 왕 약속의 성취임을 말하는 것이다. 즉 예수가 왕이며 동시에 백성이다. 아담이 왕이면서 동시에 백성이었던 것처럼 예수도 왕이면서 동시에 백성이 되어 ‘몸소 하나님 나라 auto basileia’가 된다. 이 나라에 봉사하도록 임직된 이를 그리스도라 한다. 예수께서 몸소 하나님 나라이시니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 부르는 것이다.

[1:2-16] 계시 역사는 계시하는 역사와 성취하는 역사 둘 다를 일컫는 말이어야 하고 그리고 그 둘은 동행한다. 첫번째 14대는 백성과 왕의 출현 역사이다. 두번째 14대는 출현한 왕과 백성이, 즉 출현한 나라가 임시적이며 불완전함을 보여주는, 그래서 심판받을 수밖에 없음을 증명하는 역사이다. 세번째 14대는 심판 받은 절망과, 그래서 더 이상 불완전하거나 임시적이지 않은 나라를 소망할 수밖에 없는 역사이다. 유대인 중심의 역사는 이와 같아서 자랑할 것이 없고 오히려 다른 것을 자랑해야 하는데 그것은 언약을 지켜 아들을 낳는, 유대인들이 미워하는, 여인들 그것도 이방의 여인들이다.
[1:17] 이 모든 역사의 뜻은 완전하고 분명하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세대이며 일곱 번째의 세대 즉 안식의 세대가 도래하여야 한다.

[1:18-20] 바로 이 때에 마태는 예수의 나심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이야기의 중심 인물은 물론 예수이시지만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이들은 성령, 천사 그리고 여인이다. 예수의 나심은 땅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땅에 속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혈통에게는 아무런 일도 맡겨지지 않는다. (마태의 독자인 유대인은 불쾌하다.) 유일한 유대인인 요셉이 맡은 역할은 ‘지나가는 사람 1’이다. 모든 일이 유대 나라와 관련하여 진행하지만 또한 그 모든 일은 유대인들과 상관없이 진행한다. 오직 이루어지는 것은 예언 또는 계시이다.

(여인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그림자요 모형이다. 여인에게 아들을 낳게 해주는 참된 남편은 성령/하나님이다. 마태는 요셉이 참 남편이 아니라는 것을, 잉태가 ‘성령으로 되었다’는 표현을 18절과 20절에서 연이어 사용하여 강조한다.
여인이 아들을 낳는 것은 여인의 기쁨이며 구원이다. 율법은 의롭긴 해도 이스라엘에게 그리스도를 낳게 해 주지는 못한다. 요셉이 맡은 역할은 마리아가 아들을 낳기까지 의로움 – 율법의 정신 – 으로 함께 지내는 것이고 마리아가 낳은 아들이 장성하기까지 아내와 아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아들이 하늘의 모든 것을 상속하는 때가 이르면, 요셉도 마리아도 다 아들 속으로 들어가 사라져야 한다. 장성한 아들은 자웅동체가 되어, 몸소 이스라엘 즉 몸소 아내가 되고 또한 몸소 남편이 된다. 아들은 몸소 왕이 되고 몸소 백성이 되어 아들 자체로 나라가 된다. 이것이 요셉이 ‘의롭다’ 하는 말에 대한 설명이다)

[1:21-25] 여인(마리아 또는 처녀, 그 전에는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의 아들은 두 개의 이름을 갖는다. 하나는 구원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이다. 구원의 이름 예수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 심판의 이름 임마누엘은 믿음 없는 아하스와 그 아하스의 백성을 심판한다. 심판은 임마누엘이 나타나기만 하면 즉시 시작된다. 그래서 임마누엘의 다른 이름은 ‘마헤르샬랄하쉬바즈’이다. 마태는 독자에게 ‘속히 임하는 심판이 시작되었는데 너는 어느 쪽이냐, 아하스냐 이사야냐’ 하고 질문하는 것이다.

[2:1-3] 마태는 예수의 ‘왕으로 오심’과 ‘백성으로 오심’ 중에서 먼저 왕으로 오심에 주목함으로써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래서 ‘헤롯왕 때’이다. 이 헤롯왕 때라는 지시어는 시간의 좌표가 아니라 헤롯-빌라도-가이사가 왕으로 있는 시대의 좌표를 보여주는 것이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등장하여 버젓이 ‘왕’노릇하고 있는 헤롯에게 새로운 ‘왕’에 대하여 질문한다. 하나의 질문에 두 가지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된다. 너 헤롯은 왕이 아니고 진짜 왕이 왔다는 것과, 진짜 왕을 찾아 경배하려는 참 백성은 이스라엘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 별은 박사들을 곧장 베들레헴으로 인도하지 않고 헤롯 왕 앞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박사들은 콧털을 건드리는 정도가 아니라 강력한 원투 펀치를 헤롯과 헤롯의 백성에게 올려 먹인다.

[2:4-6] 헤롯은 자신이 왕으로 있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를 갖고 있어서 왕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리스도에 대하여 탐문할 수 있을 정도이다. 전문가들은 전문가답게 적절한 대답을 한다. 왕-그리스도가 나는 곳은 떡집-베들레헴이다. 왕 헤롯은 예루살렘 왕궁에 있고 왕 예수는 떡집에 떡으로 있다. 헤롯이 백성의 떡을 앗아 자기 입에 넣는 왕이라면 예수는 친히 떡이 되어 백성의 양식이 되어주는 왕이다. 이것이 예수의 베들레헴에 나심의 의미이다. 그래서 마태는 미가 뒤에 에스겔 또는 사무엘하 5:2을 이어붙여 베들레헴에서 나는 이는 반드시 ‘목자’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은 목자가 아니면 왕이 아니다. ‘목자-왕’은 자신의 생명을 죽음에 내주고 백성을 살린다. 목자는 자신을 양의 꼴로 내준다. 양은 목자를 먹고 산다. 그래서 왕으로 오신 예수는 떡집-베들레헴에 나시는 것이다.

[2:7-12] 헤롯은 살인자의 마음으로 왕을 찾고 박사들은 경배를 위해 왕을 찾는다. 박사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하다. 10절이 그것을 보여준다. 기뻐하였다고만 해도 될 것을 온갖 말을 덕지덕지 덧붙이고 반복하여 기뻐하였다고 한다. 박사들은 어느 덧 열방 또는 열방의 왕이 이스라엘 왕을 예방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그것은 열방의 대표로 예물을 갖고 솔로몬을 방문한 스바 여왕을 떠올리게 하거나 이사야 60장의 성취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왕으로 오신 예수 이야기에서 백성으로 오신 예수 이야기로 전환되고, 마태는 두 번의 인용을 통해 헤롯 나라의 정체를 폭로한다.

[2:13-15] 유대땅-이스라엘이 애굽이다.
마태는 유대땅에서 애굽으로 탈출하는 예수를 두고 호세아를 인용하여 이것이 출애굽이라 한다. 마태가 인용한 호세아의 애굽은, 당연히 헤롯이 왕으로 있는 유대땅이다. 유대땅에서 헤롯은 바로 왕의 자리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탄생을 저지하고 있다. 예수는 새로운 백성이다. 예수가 참이스라엘이고 예수를 반대하는 것이 애굽이다.

[16-18] 유대땅-이스라엘이 바벨론이다.
마태는 출애굽의 그림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포로로 잡혀가던 때의 그림을 가져온다. 라마는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잡아가던 포로집결지로서, 마태는 옛날 이스라엘이 잡혀가던 때에 발생한 일이 지금 여기서 일어났다고 말하면서,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없애버리는 바벨론 군대 역할, 라헬-이스라엘을 애곡하게 하는 일을 헤롯의 군대가 맡았다고 말함으로써 이 유대땅-이스라엘이 바로 바벨론이라고 폭로하는 것이다.

[2:16-23] 그렇다면 참된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을 잘 하였고, 또 새로운 약속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게 잘 돌아왔을까. 마태는 그렇다고 한다. 오직 한 사람뿐의 모습이긴 하지만 이제 나사렛에서 사는 이 예수가 출애굽하였던 참 이스라엘이요, 돌아온 스알야숩(남은 자가 돌아오리라)이다. 나사렛은 유대땅 갈릴리의 비천한 곳이고(요 1:46 등), 그리스도가 낮은 곳으로 오시고 낮은 것을 거처로 심으실 것은 많은 선지자들이 말해 온 것이다(23절의 선지자는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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