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만 장군과 떠오른 도끼(왕하 5: – 6:7)
| 나아만 이야기(5장) – 실은 이스라엘 이야기 – 는, 마태복음이 헤롯으로 시작하여 빌라도로 끝나는 것처럼, 문둥병으로 시작하여(1) 문둥병으로 끝난다(27). 문둥병 – 불가항력적인 부정 – 은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요청이거나(나아만)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받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게하시). 이 이야기는 이방인 나아만의 은혜입음과 신앙고백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책망하면서 동시에 게하시의 탐욕을 들어 ‘이스라엘 왕의 탐욕’을 책망한다. – - – - – - 나아만이 존귀한 까닭은 그가 자기 나라에 구원을 주었기 때문인데, 그 구원은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이다(1). 열왕기 기자는 나아만이 여호와를 힘입어 자기 나라에 구원을 주었다고 말하면서,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이 그 의지하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면, 하물며 이스라엘 왕이 여호와께 의지하면 얼마나 더 힘이 되시겠는지 알아야 한다고 독자에게 말한다. 왕이 끝내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라도 패망하고 말 것이다. 왕의 이름이 여호람인 것을 독자마다 밝히 알지만 그 이름을 말하지 않고 ‘이스라엘 왕’이라고 부르고 마는 것은, 이 원리가 여호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왕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사 역시 동일한 목적에 의해 그 이름 대신 선지자, 하나님의 사람 등으로만 불린다. 이스라엘 왕이 나아만을 대면하는 시간은 이스라엘왕 자신의 정체와 방향을 드러내야 하는 결정적 시간이다. 나아만이 왕 앞에 와서 당신에게 또는 ‘당신의 나라에 여호와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자 ‘내게는 여호와가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옷을 찢음은 여호와의 신성이 침범되는 참람한 상황 앞에서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이스라엘 왕은 자기 옷을 찢으며 가장 경건한 언사를 내보이지만 실은 불신과 분노의 표현일 뿐이다. 엘리사는, 나아만을 가리켜 ‘저가’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는 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실로 알아야 하는 자는 나아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왕이다. 나아만은 엘리사를 만날 필요도 없다. 한 백부장이 예수께 고백한 것처럼(눅 7:1-10), 나아만이 만나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말(씀)’이다. 더 깨끗한 물도(12) 마술도(11)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믿음과 순종이다. 믿음은 말하는 자의 말을 믿는 것이고 순종은 말하는 자의 말을 따르는 것이다. 이 외에는 정결로 ‘돌아’ 올 길이 없다. 그 길의 구체적인 내용은 오직 하나님께서 정한 곳(요단강)과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일곱 번 씻음)이다. 거기에만 ‘돌아’(10, 14; 여전-) 오는 길이 있다. 죽었다가 사는 세례를 철저히(일곱 번 10, 14) 받아들임을 통해 정결/부활을 입은 나아만은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던 길로부터(12) ‘하나님의 사람’에게 ‘도로’ 와서(15) 신앙을 고백한다. 그리고 결단코 예물을 받지 않는 엘리사로부터 은혜는 갚을 길이 없는 것이라는 사실, 또는 하나님의 선물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15-16, cf.행 8:18-21). 그에게 남은 것은 이스라엘에만 계신 신을 경배/사모하며 사는 것과(17) 일상 속에서 계속적인 사유하심을 바라는 중에 고난의 시간을 통과하며 사는 것 뿐이다(18).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평안히 가라’고 한다(19). 고난이 있다고 평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만을 믿게 된 나아만 앞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게하시가 등장한다. 게하시는 항상 말씀을 들을 기회 속에 그리고 약속의 땅에 살지만 참으로 귀하게 여겨야 하는 율법과 약속을 잃어버린, 탐심으로 자신을 채운 이스라엘(왕과 백성)의 전형적 알레고리이다. 게하시의 부정은 게하시의 불가항력적인 무능이다. 게하시-이스라엘에는 승리가 있을 수 없다. 앗수루의 침공 –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 – 앞에서 이스라엘(집)의 승리(보존 혹은 재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엘리사-여호와(의 동행) 뿐이다. 이어지는, ‘물 위로 떠오른 도끼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독자에게 가르친다. 새 집을 짓는 사람은, 집 짓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을 회복하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능력 바깥에 있고,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사건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해결할 수 없(기에 문제)다. 문제의 시간은 하나님을 불러야 하는 것을 기억나게 하는 은혜의 때다. 가장 사소한 것은, 잃어도 사소한 것이고 회복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인 만큼 회복도 불가능하다. 도끼는 물에 빠지고 되찾을 길도 되갚을 길도 없다 – 그래서 집도 지을 수 없다 -. 그때는 아아! 하고 외쳐야 한다. 엘리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가장 사소한 것을 물 위로 던지고 가장 무거운/소중한 것을 취하는 광경을 모두가 보게 한다. 건져 올린 것은 도끼이지만 이스라엘이 – 그리고 독자가 –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엘리사-하나님’이다. 엘리사가 아니면 집을 지을 수 없다. 이스라엘(왕과 백성)이 배워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이, 또는 그 정도를 훨씬 넘어, 친히 이스라엘(집)이신 – 친히 성전이신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배워야 한다. 그 외에는 집(으로의 길)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