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마대 요셉과 여인들에 대한 오해

tomb near haifa

아리마대 요셉과 여인들에 대한 오해가 더러 있는 것 같아 몇 말씀 드립니다.


먼저, 아리마대 요셉


마태와 요한은 그를 분명하게 제자(disciple)라고 부르기는 합니다만, 사도로 부름받은 이들이 다 사라지고/도망가고/부인하고 아무도 남지 않았던 시점에,  여태 있는지조차 알수 없었던 그가 불쑥 등장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리라(마 19:20f.)’ 하신 말씀만큼이나 의외의 사건입니다. 게다가 그는 부자이기도 하잖아요?


공회 의원이었던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중에 예수를 만나고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의 이 본문에서 니고데모와 함께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다른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니고데모와 함께 예수와 교제를 나누어왔을 겁니다.)
하지만 공회 의원이었던 그가 예수를 따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 분명한데 이를 두고 요한복음은 그가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숨기고 있었다고 짤막하게 언급합니다.


숨어 있던 그가 무슨 이유로 자기를 드러내게 되었을까요? 그의 내적 외적 동기에 대해서는 사복음서 전체가 침묵하면서 우리의 궁금함을 외면합니다.
복음서들은, 동기야 어떠했든 숨어있던 그가 심지어 당돌하게(막 15:43) 예수의 몸을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했다고 밝힐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장사를 지냅니다. 예수의 몸을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싸서 무덤에 두고 무덤문을 닫습니다. 무덤문은 돌문입니다. 이 돌문은 ‘심히 큰 돌문(μéγας σφóδρα, extremely large -NASB)’이며 여자 세 명 정도로는 움직일 엄두를 못 낼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막 16:2-4). 그런 돌문으로 무덤을 막자 그 무덤은 그야말로 한 부분도 서툰 구석이 없는 온전한 무덤이 되었습니다. 모든 상황이 종결되었습니다. 지켜보던 여인들도 돌아갔습니다. 내일 오전쯤 로마 군병이나 성전 수비대가 무덤을 지키러 오겠지요(마 27:62ff.) 여기까지가 아리마대 요셉 이야기의 대강입니다.


여기부터가 중요합니다.
공관복음서는 말할 것도 없고 요한복음까지도 포함하여 사복음서는 예외없이 아리마대 요셉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복음서는 아리마대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요? 아리마대 요셉의 담대함과 헌신을 말하면서 독자들에게 도전하고 자극하고자 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등장과 더불어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을 크게 두 가지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그가 예수의 죽음을 참된 죽음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는 대충 죽은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죽었음을 아리마대 요셉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읽을 때에 예수의 죽음이 참된 죽음이라는 것 즉 시늉만 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전하는 복음서 기자들의 외침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이사야 53:9의 예언을 성취되었으니 보라는 외침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예언된 대로 나셨을 뿐 아니라 예언된 대로 돌아가셨으며 또한 예언된 대로 묻히셨다는 것이 이 본문의 외침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묘실을 제공하여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시키고, 또 무덤을 참 무덤으로 만들어 예수의 죽음을 참된 죽음으로 분명하게 하고 또 한 이 아리마대 요셉에게 참 감사합니다.


둘째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아리마대 요셉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그는 돌아가신 선생님을 니고데모와 함께 최고의 예우로 장사를 지냈지만(이 부분은 요한복음이 예수의 왕적 죽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무덤문을 강력하게 틀어막음으로써 다시 살아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안식일 아침 무덤 문앞에 등장하는 것은 여일들 뿐입니다. 물론 그 이후로도 명시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예수에게 배웠지만 배운 것을 그는 마음이나 머리에 담아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사랑과 공경과 헌신뿐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음, 여인들


여인들에 대해서는 더 길게 그리고 더 격하게 말씀드리고 싶지만 대체적인 이야기를 위에서 이미 했기 때문에 짤막하게 말씀드립니다. 


여인들도 아리마대 요셉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죽음을 분명히 하는 역할을 하고 또 동일한 불신의 자리에 있습니다.
여인들은 십자가 가까이서 예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 볼 뿐 아니라 그의 무덤까지 따라가서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를 장사지내는 모습까지 지켜봅니다. 그들은 미리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였다가 안식일 후 첫날 새벽 무덤에 찾아 옵니다.


그러나 흔히 짐작하는 바와는 달리, 여인들이 새벽같이 무덤에 찾아 온 까닭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향품과 향유 역시 부활하신 예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가는 것은 부활하신 주를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무덤을 보려고 가며(마(28:1), 가면서 그들 스스로도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막 16:3)’할 뿐 아니라, 무덤에서 여인들의 근심은 주 예수위 시체가 보이지 않는 것이며, 천사도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책망하고(눅 24:3-5), 막달라 마리아는 주께서 부활하여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갔다 하고 자기가 가져가겠다(요 20:2, 13, 15)고 하는 등의 말씀을 보면 여인들이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며 무덤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인들에게도 역시, 아리마대 요셉과 같이, 예수의 부활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그런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경우와 같이 참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결론


1.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들을 읽고서, 예수의 죽음을 당하여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 거의 분명한데도 담대히 자신을 노출시키고 또 자기의 귀한 것을 드려 장사까지 지낸 아리마대 요셉의 신앙을 본받자거나, 혹은, 새벽같이 일어나 부활하신 예수를 누구보다 먼저 만날 수 있었던 여인들의 애틋하고 아름다운 열심과 사랑과 신앙을 본받자고 외치면 곤란합니다.


2. 그러면, 어떻게 묵상하고 적용하는 것이 좋을까요?


첫째는, 요약컨대, 그들 때문에 분명해진 예수의 진짜 죽음을 잘 새겨야 하고, 그 죽음이 우연히 또는 정치적으로 죽음이 아니라 예언된 대로의 죽음 즉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 베푸심(이사야 53:1 ff.)이었다는 것을 깊이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그들의 믿음/생각 없음, 기억 못함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 모두는 예수의 죽음을 잘 드러내기는 했지만, 부활에 대해서는 그들 속에 한 푼어치의 생각도 믿음도 없었음을 본다면 예수의 죽음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도 역시 잘 알아차리지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다만 이어지는 사도행전(에서의 성령의 오심)이 그들과 우리에게 위로입니다.


둘째는, 그와 동시에, 훈련에 대한 오해를 정정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겠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도 자주 보여줄 뿐 아니라 모든 복음서 말미에서 전격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이(특히 마가복음), 제자는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도 배울 수 없는 것이 예수의 교훈이며 예수를 따르는 삶입니다. 믿음없는 제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요셉이건 여인들이건 배울 만큼 배웠지만 그것도 예수로부터 직접 배웠지만 그것으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벌써 당신은 떠나고 성령을 보내실 것을 누차 말씀하셨습니다. 사도가 사도가 되고 제자가 제자가 되고 성도가 성도가 되는 것은,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께서 모든 것을 깨닫게 하고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는 성령을 보내주셔서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가 되는 겁니다. 교회는 죽으신 주를 늘 기념/기억하고(in rememberance of) 주의 부활을 항상 믿고 증거하며(give witness to) 즐거워하는(celebrate) 것이 교회잖아요? 이 주의 부활을 기억하고 믿는 일은 사도행전에 와서야 가능해집니다. 그런 이유로 복음서에 사도행전이 떨어져 있지 않은 거지요.


모든 복음서는 사도행전을 강력하게 고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 2장이요. 여종의 추궁 앞에서 쩔쩔 매는 것을 지나, 저질의 욕으로도 모자라 결국은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부터 사도가 됩니다. 성령이 오셔서 베드로의 지식과 기억을 새롭게 하신 것이지요.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아울러 말해 보면, 부르심도 은혜요 부름받아 사는 것도 은혜라는 말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 올 수 있게 된 것도 주님의 능력이요 좁은 길을 걸을 수 있게 되는 것도 성령의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마지막에 덧붙여, 그러면 훈련은 없느냐? 훈련이 왜 없겠습니까? 훈련은 있습니다. 훈련으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제자가 된 사람은 날마다 훈련합니다. 달려갈 길을 다 달리기까지 달려가는 거지요. 날마다 더욱 배우기도 하고요. 매일 성경을 하는/읽는 것도 그 한 모습이겠습니다.


여러분이, 그리고 제가, 우리 주님의 교회가, 주의 부활을 한 시도 잊지 않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다시 오신다 하신 주님,
다시 오신다 하신 그 말씀 한 시도 잊지 않고 있사오니,


어서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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