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八家詩抄

十一月五日暫往西張 - 元好問

十一月五日暫往西張 11월 5일 서장에 잠시 머무르다.

城隈細路入沙汀  성을 끼고 난 사잇길로 모래톱에 들어서다.
絮帽沖風日再經。두터운 모자 속으로 스미는 바람, 또 하루가 가는구나.
歉歲村墟更荒惡,흉흉한 세월에 마을은 올해도 황폐한데,
窮冬人影亦伶俜。겨울이 깊어서 사람들도 비틀거리네.
林煙漠漠鴉邊暗,숲에는 자욱한 안개, 어둠도 짙어오는데, (鴉 : 검을 아)
山骨稜稜雪外靑。산에는 첩첩이 바위, 눈 비낀 하늘에 푸른 빛 조각. (骨 : 山岩; 稜稜=棱棱)
四十年來此寒苦,사십에 찾아 온 이 추위와 아픔이라니,
凍吟猶記隴關亭。얼어붙은 소리 흘리며 농관정에서 적다.

十八家詩抄 - 卷二十五

도서 [목적이 이끄는 삶] 비평

(이 글은 내가 조금 발을 담그고 있는 선교단체의 게시판에 올렸던 글입니다. 여기 블로그에서도 관계된 글을 번역하다가 마무리를 못하고 묵혀두고 있는 포스트들이 있는데 http://parabolog.wordpress.com/page/3/?s=purpose+driven에서 볼 수 있습니다.)


벌써부터 (2005년) 여기서 나누고 싶었지만 게으름의 병이 깊어 그러지 못하다가 얼마 전 교회에서 함께 생각할 기회를 가진 후 우리 SU선생님들과도 나눌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홈페이지 활성화의 한 방안으로 영화 티켓이 걸린 이벤트가 진행중인 것은 알지만 득점을 위한 포스팅이 아니란 걸, 쓸데없이, 언급해둡니다.
이 비평은 도서 [목적이 이끄는 삶]의 서론 부분에 대한 비평입니다.


책(한글판)을 열면  저자인  릭 워렌의 한국어판 권두언, 사랑의 교회 옥한음 목사,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목사,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 등의 추천사들이 이어지고 목차를 넘기면 서문이 나타난다.
각설하고, 서문의 내용 중 일부를 아래 푸른 박스에 인용하면서 바로 비평으로 들어간다. 번호는 원래 없는 것이지만 편의상 넣은 것이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그분의 목적을 위해 준비시킬 때마다 40일이 걸렸다.

1. 노아의 삶은 40일 동안 내린 비로 변화되었다.
2. 모세는 시내산에서 보낸 40일 동안 변화되었다.
3. 정탐꾼들은 약속의 땅을 40일동안 바라보면서 변화되었다.
4. 다윗은 골리앗의 40일간의 도전으로 변화되었다.
5. 엘리야는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먹고 40일 동안 그 기운이 남아 있는 것을 경험하고 변화되었다.
6. 니느웨 온 도시는 하나님이 회개하도록 주신 40일동안 변화되었다.
7. 예수님은 40일간의 광야 생활을 통해 능력을 받으셨다.
8. 제자들은 부활 이후 40일을 함께 지내면서 변화되었다.

앞으로의 40일이 우리를 변화시킬 것이다.

1. 노아의 삶은 40일 동안 내린 비로 변화되었다.

노아는 비내리는 40일 동안 변화된 것이 아니다.
노아는 이미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였고, 의인이었고, 당세에 완전한 자였으며, 하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창 6:8-9).
홍수 후에 새롭게 창조된 세계에서 아담과 하와가 처음 지음을 받았을 때의 모습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과 잔치를 누리는 모습을 보면(9:20-21) 그가 홍수를 겪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새롭고 풍성하게 된 것은 분명하다고 해야 하겠지만, 비내리는 40일이 노아의 변화를 위한 것이라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40일 전에는 노의 삶이 어떠했고 40일 후에는 노아의 삶이 어떻게 변했다는 말인가. 120년간 오직 말씀에 의지하여 마른 땅에서 배를 짓고 있었던 순종의 노아가 40일간 비가 내리기 전에는 노아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몰랐다는 것인가?

설명할 것도 없다. 비내리는 40일은 노아의 변화의 시간이 아니라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심판의 시간이다.

2.모세는 시내산에서 보낸 40일 동안 변화되었다.

모세가 산에 올라 40주야를 보낸 것은 두 번이다. 한 번은 첫번째 돌판을 받으러 올라갔을 때이고(출 24:12-18), 또 한 번은 두번째 돌판을 들고 올라 갔을 때이다(34:1, 28).  그렇다면 릭 워렌은 어느 40일에 모세가 변화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어느 40일이든 그 40일을 보내고 나서야 모세는 자기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되었다는 말인가가? 40일 전의 모세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었으며 40일 후에 변화된 모세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이라는 말인가?

모세가 40일을 산 위에서 보낸 시간은 모세의 변화를 위한 시간이 아니다. 모세는 변화받기 위해 산에 올라 간 것이 아니라 산에 올라 내게 보이라는 말씀이나 올라와 내게 보이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올라간 것이다(출 24:12; 34:2). 모세의 변화를 이야기하려면 미디안에 보내야 했던 40년이나 그 끝무렵에 여호와께서 꺼지지 않는 불 가운데서 만나 그를 부르신 사건을 언급해야 정당할 것이다.

3. 정탐꾼들은 약속의 땅을 40일동안 바라보면서 변화되었다.

오호 통제라! 정탐꾼들이 약속의 땅에서 40일을 보내면서 변화되었다니!
민수기 13장과 14장을 읽어 보라. 정탐들은 40일간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하였고 그로 인해 백성은 원망과 두려움과 불신에 이르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2주나 한 달이면 갈 수 있는 가나안 여정이 40년으로 늘어난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이 정탐들이 가나안을 정탐한 40일의 매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여 40년간 광야를 돌면서 원망과 불신의 세대가 다 죽기까지 하나님께서 그 길을 늦추셨던 것이다.
어찌 이 정탐의 일을 두고 ‘40일간의 영적 여정을 위한 안내서’가 왜 40일을 의미심장하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로 제시하는지 통탄할 일이다. 혹 모르겠다. 40일 여정을 잘못 보내면 이런 중대한 범죄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는.

4. 다윗은 골리앗의 40일간의 도전으로 변화되었다.

계속 놀람을 금할 수 없다. 어쩌면 이렇게 담대하게 글을 쓸 수 있는 거지?
다윗의 세 형은 이미 전쟁 중에 있고 골리앗은 날마다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고 있었다. 그런 기간이 40일이었다. 그런 중에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전쟁터 엘라 골짜기까지를 왕래하면서 아버지 이새의  심부름도 하고 베들레헴에서는 양도 치고 있었다.
사무엘상 17장을 읽어보라(40일 이야기는 16절에 나온다). 어떻게 무슨 근거로 다윗이 40일 동안을 골리앗의 도전을 받았으며 그 도전을 통해 다윗이 변화받았다고 하는가?
성경은 골리앗이 40일동안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것을 다윗이 알았다고 하지도 않는다. 40일의 마지막날 또는 40일 직후의 어느날, 아버지 이새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도착한 다윗은 그제서야 골리앗의 조롱하는 말을 듣게 된다.

40일을 통한 변화를 말하기 전에 다윗이 만류하는 사울에게 자기의 과거를 고백하는 말을 들어 보라.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삼상 17:34-37a).

그리고 이 말씀도 읽으며 다윗이 40일간의 여정으로 통해 변화되었다고 하는 것이 정당한지 생각해보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삼상 16:13)
 


화가 나서 더 이상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화나고 피곤해도 성실하게 끝까지 가야 하지만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이어지는 5., 6., 7., 8. 번의 내용도 모두 거짓말입니다. 릭 워렌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모두 사기란 말입니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것으로 계속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또 머리 속으로만 대충 생각하는 것도 멈추고, 성경을 펴 놓고 5., 6., 7., 8. 번의 내용에 해당하는 본문을 찬찬히 읽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상되는 질문과 그 외 몇 가지를 주절거리며 마쳐야 하겠습니다.

릭 워렌은 앞선 책 새들백교회 이야기(원제: 목적이 이끄는 교회)에서도 성경을 이리저리 비틀어 마음대로 끌어가더니 이 책에서도 변화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담대한 저자도 놀랍고 이런 책을 낸 릭 워렌이 목회하는 교회같은 교회가 되지 못해 부러워하는 마음으로 책을 이렇게 저렇게 권하고 읽는 한국 교회도 놀랍습니다.

성경으로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이 릭 워렌은 불신자일까요? 책의 내용들을 살펴 보면 그를 불신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자로든지 목회자로든지 여러 모로 인기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큰 교회와 작은 교회 사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교회를 부러워하게 만들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위험 인물인 것은 거의 틀림없습니다.

무엇보다 이 비평의 연속성 상에서 말해 본다면, 그가 무책임한 신앙 서적 저자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함께 40일 여행을 시작하자고 촉구하면서 40일 여행의 중요성을 말하는 근거로 든 여덟 가지 예가 어떻게 하나같이 거짓말일 수 있는 겁니까? 그리고 이런 서문이 있는 책을 위해 기꺼이 추천사를 쓴 한국의 대표적인 유명 목사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완벽한 신앙 서적은 없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좋은 책이나, 좀 나은 책이나, 좀 못한 책이나 거의 쓸모 없는 책은 있겠지만 완벽한 신앙서적은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는 신앙 서적에 연연해 하지 마시라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많은 경우 성경은 읽지 않고, 그래서 성경으로부터는 도움을 얻지 못하고 소위 ‘좋은 신앙서적’으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찾아 다닙니다. 성경에서 위로를 얻지 못하는데 신앙서적으로부터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요? 또 얻을 수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바람직한 일일까요?

둘째는 성경을 펼쳐놓고 읽을 것을 권합니다. 문자적으로 신앙서적 바로 옆에 성경도 펴 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비춰 보아서 수납할 만한 내용/주장인가를 생각하면서 읽으시라는 겁니다. 그렇게 읽으시면서 아멘 할 부분은 아멘하고, 새삼스럽게 깨달은 부분은 감사하고, 성경과 맞지 않는 부분은 버리고, 그러면서 읽는 거지요.
(이 책 안에도 귀한 내용이 있음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행하게도 서문에서는 취할 부분이 없었습니다. 서론이 없었더라면 책은 조금 더 좋아질 수 있을 뻔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땠습니까?

아리마대 요셉과 여인들에 대한 오해

tomb near haifa

아리마대 요셉과 여인들에 대한 오해가 더러 있는 것 같아 몇 말씀 드립니다.


먼저, 아리마대 요셉


마태와 요한은 그를 분명하게 제자(disciple)라고 부르기는 합니다만, 사도로 부름받은 이들이 다 사라지고/도망가고/부인하고 아무도 남지 않았던 시점에,  여태 있는지조차 알수 없었던 그가 불쑥 등장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리라(마 19:20f.)’ 하신 말씀만큼이나 의외의 사건입니다. 게다가 그는 부자이기도 하잖아요?


공회 의원이었던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중에 예수를 만나고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의 이 본문에서 니고데모와 함께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다른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니고데모와 함께 예수와 교제를 나누어왔을 겁니다.)
하지만 공회 의원이었던 그가 예수를 따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 분명한데 이를 두고 요한복음은 그가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숨기고 있었다고 짤막하게 언급합니다.


숨어 있던 그가 무슨 이유로 자기를 드러내게 되었을까요? 그의 내적 외적 동기에 대해서는 사복음서 전체가 침묵하면서 우리의 궁금함을 외면합니다.
복음서들은, 동기야 어떠했든 숨어있던 그가 심지어 당돌하게(막 15:43) 예수의 몸을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했다고 밝힐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장사를 지냅니다. 예수의 몸을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싸서 무덤에 두고 무덤문을 닫습니다. 무덤문은 돌문입니다. 이 돌문은 ‘심히 큰 돌문(μéγας σφóδρα, extremely large -NASB)’이며 여자 세 명 정도로는 움직일 엄두를 못 낼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막 16:2-4). 그런 돌문으로 무덤을 막자 그 무덤은 그야말로 한 부분도 서툰 구석이 없는 온전한 무덤이 되었습니다. 모든 상황이 종결되었습니다. 지켜보던 여인들도 돌아갔습니다. 내일 오전쯤 로마 군병이나 성전 수비대가 무덤을 지키러 오겠지요(마 27:62ff.) 여기까지가 아리마대 요셉 이야기의 대강입니다.


여기부터가 중요합니다.
공관복음서는 말할 것도 없고 요한복음까지도 포함하여 사복음서는 예외없이 아리마대 요셉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복음서는 아리마대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요? 아리마대 요셉의 담대함과 헌신을 말하면서 독자들에게 도전하고 자극하고자 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등장과 더불어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을 크게 두 가지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그가 예수의 죽음을 참된 죽음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는 대충 죽은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죽었음을 아리마대 요셉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읽을 때에 예수의 죽음이 참된 죽음이라는 것 즉 시늉만 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전하는 복음서 기자들의 외침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이사야 53:9의 예언을 성취되었으니 보라는 외침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예언된 대로 나셨을 뿐 아니라 예언된 대로 돌아가셨으며 또한 예언된 대로 묻히셨다는 것이 이 본문의 외침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묘실을 제공하여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시키고, 또 무덤을 참 무덤으로 만들어 예수의 죽음을 참된 죽음으로 분명하게 하고 또 한 이 아리마대 요셉에게 참 감사합니다.


둘째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아리마대 요셉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그는 돌아가신 선생님을 니고데모와 함께 최고의 예우로 장사를 지냈지만(이 부분은 요한복음이 예수의 왕적 죽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무덤문을 강력하게 틀어막음으로써 다시 살아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안식일 아침 무덤 문앞에 등장하는 것은 여일들 뿐입니다. 물론 그 이후로도 명시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예수에게 배웠지만 배운 것을 그는 마음이나 머리에 담아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사랑과 공경과 헌신뿐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음, 여인들


여인들에 대해서는 더 길게 그리고 더 격하게 말씀드리고 싶지만 대체적인 이야기를 위에서 이미 했기 때문에 짤막하게 말씀드립니다. 


여인들도 아리마대 요셉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죽음을 분명히 하는 역할을 하고 또 동일한 불신의 자리에 있습니다.
여인들은 십자가 가까이서 예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 볼 뿐 아니라 그의 무덤까지 따라가서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를 장사지내는 모습까지 지켜봅니다. 그들은 미리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였다가 안식일 후 첫날 새벽 무덤에 찾아 옵니다.


그러나 흔히 짐작하는 바와는 달리, 여인들이 새벽같이 무덤에 찾아 온 까닭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향품과 향유 역시 부활하신 예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가는 것은 부활하신 주를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무덤을 보려고 가며(마(28:1), 가면서 그들 스스로도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막 16:3)’할 뿐 아니라, 무덤에서 여인들의 근심은 주 예수위 시체가 보이지 않는 것이며, 천사도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책망하고(눅 24:3-5), 막달라 마리아는 주께서 부활하여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갔다 하고 자기가 가져가겠다(요 20:2, 13, 15)고 하는 등의 말씀을 보면 여인들이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며 무덤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인들에게도 역시, 아리마대 요셉과 같이, 예수의 부활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그런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경우와 같이 참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결론


1.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들을 읽고서, 예수의 죽음을 당하여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 거의 분명한데도 담대히 자신을 노출시키고 또 자기의 귀한 것을 드려 장사까지 지낸 아리마대 요셉의 신앙을 본받자거나, 혹은, 새벽같이 일어나 부활하신 예수를 누구보다 먼저 만날 수 있었던 여인들의 애틋하고 아름다운 열심과 사랑과 신앙을 본받자고 외치면 곤란합니다.


2. 그러면, 어떻게 묵상하고 적용하는 것이 좋을까요?


첫째는, 요약컨대, 그들 때문에 분명해진 예수의 진짜 죽음을 잘 새겨야 하고, 그 죽음이 우연히 또는 정치적으로 죽음이 아니라 예언된 대로의 죽음 즉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 베푸심(이사야 53:1 ff.)이었다는 것을 깊이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그들의 믿음/생각 없음, 기억 못함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 모두는 예수의 죽음을 잘 드러내기는 했지만, 부활에 대해서는 그들 속에 한 푼어치의 생각도 믿음도 없었음을 본다면 예수의 죽음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도 역시 잘 알아차리지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다만 이어지는 사도행전(에서의 성령의 오심)이 그들과 우리에게 위로입니다.


둘째는, 그와 동시에, 훈련에 대한 오해를 정정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겠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도 자주 보여줄 뿐 아니라 모든 복음서 말미에서 전격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이(특히 마가복음), 제자는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도 배울 수 없는 것이 예수의 교훈이며 예수를 따르는 삶입니다. 믿음없는 제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요셉이건 여인들이건 배울 만큼 배웠지만 그것도 예수로부터 직접 배웠지만 그것으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벌써 당신은 떠나고 성령을 보내실 것을 누차 말씀하셨습니다. 사도가 사도가 되고 제자가 제자가 되고 성도가 성도가 되는 것은,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께서 모든 것을 깨닫게 하고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는 성령을 보내주셔서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가 되는 겁니다. 교회는 죽으신 주를 늘 기념/기억하고(in rememberance of) 주의 부활을 항상 믿고 증거하며(give witness to) 즐거워하는(celebrate) 것이 교회잖아요? 이 주의 부활을 기억하고 믿는 일은 사도행전에 와서야 가능해집니다. 그런 이유로 복음서에 사도행전이 떨어져 있지 않은 거지요.


모든 복음서는 사도행전을 강력하게 고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 2장이요. 여종의 추궁 앞에서 쩔쩔 매는 것을 지나, 저질의 욕으로도 모자라 결국은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부터 사도가 됩니다. 성령이 오셔서 베드로의 지식과 기억을 새롭게 하신 것이지요.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아울러 말해 보면, 부르심도 은혜요 부름받아 사는 것도 은혜라는 말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 올 수 있게 된 것도 주님의 능력이요 좁은 길을 걸을 수 있게 되는 것도 성령의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마지막에 덧붙여, 그러면 훈련은 없느냐? 훈련이 왜 없겠습니까? 훈련은 있습니다. 훈련으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제자가 된 사람은 날마다 훈련합니다. 달려갈 길을 다 달리기까지 달려가는 거지요. 날마다 더욱 배우기도 하고요. 매일 성경을 하는/읽는 것도 그 한 모습이겠습니다.


여러분이, 그리고 제가, 우리 주님의 교회가, 주의 부활을 한 시도 잊지 않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다시 오신다 하신 주님,
다시 오신다 하신 그 말씀 한 시도 잊지 않고 있사오니,


어서 오시옵소서.

Thanks To GOD

이 노래가 1891년 12월 5일자 스웨덴 구세군 회보인 StridsRopet (War Cry)에 처음 실렸을 때는 웨일즈 곡조에 가사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1910년 Hultman에의해 작곡된 가락에 노랫말을 붙여 부르게 되면서 유명한 노래가 되었습니다. 스웨덴 말이었던 가사가 영어로 번안된 것은 1933년 Carl E. Backstrom에 의해서였습니다.

작시자인 August Ludvig Storm(1862-1914)은 스웨덴 Motala에서 출생하였고 어릴 때 구세군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회심하였습니다. 1880년 구세군에 가입하여 lieutenant colonel (중령: 구세군 명칭은 모르겠음)에 이르렀으며 1892년에는 재정 담당관이 되었습니다. 1899년 37세에 척추 장애를 입어 장애인이 되었지만 구세군에서의 직무를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1914년 7월 1일 August는 지난 십 수년 동안 고통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요와 평화도 함께 있었음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또다른 노래를 지었고 곧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 후 구세군 회보 War Cry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힘 있고 사려깊으며 잘 준비된 그의 설교를 듣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지은 수 많은 노래들은 구세군에서 펴낸 노래들 중 최고의 것이었다”

작곡자인 Johannes Alfred Hultman(1861-1942)의 가족은 1869년 미국으로 이민하여 일리노이주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는 16살에 설교자가 되었고 1906년부터 스웨덴과 미국에서 찬양 사역자로 죽 일했으며 “Sunshine singer”라는 찬사를 들었습니다. 미국에서는 Cymbalen이라는 찬양집을(1885, 1888), 스웨덴에서는 Solskenssång­er라는 찬양집(1910-1939)을 펴냈습니다. 그는 생전에 500여곡의 찬양을 작곡했습니다.

이 노래는 원래 4절이며 총 32번의 감사로 노래합니다. 하지만 영어로는 세 절만 옮겨진 것 같고 그 이후로도 죽 세 절만 불리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영어로 옮겨질 때 원래의 시가 너무 많이 변형된 것 같다는 사실입니다. 뜻이 바뀔 뿐 아니라 순서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영어로 그리고 한국어로 옮겨진 대로의 가사도 그런대로 좋지만 부를 때마다 그 노래하는 구원과 감사가 퍽이나 자기 중심적이라는 느낌을 받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었는데 스웨덴어에서 직접 옮기면서 보니 원래의 가사는 그 중심이 하나님께 가 있고 그래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가사보다 훨씬 깊고 더욱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스웨덴어를 모르기 때문에 인터넷의 스웨덴어 사전으로 끙끙거리며 끼워 맞추면서도 몇 번씩이나 아! 하고 탄성을 질렀는지 모릅니다. 작시자 Storm의 신앙과 심정이 그의 노래와 고백을 통해 120여년의 거리를 넘어 제 안에도 동일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웨덴어가 아닌 말로 4절까지 소개하는 것은 영어권 비 영어권을 막론하고 이것이 처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깊은 가사가 얕은 가사로 바뀐 것을 되돌려 보려고 스웨덴어 노랫말에서 직접 우리말로 옮겨 보았지만 시로 즉 노랫말로 옮기는 것은 어려웠고 뜻만 조금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가사의 뜻에 은혜 받으시기를. 아 그리고 혹 주위에 스웨덴어를 모국어처럼 쓰시는 분 있으면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연결해 주십시오. 

참조한 웹페이지:
http://brodiehackney.wordpress.com/2007/11/22/thanks-to-god/
http://www.tanbible.com/tol_sng/thankstogod.htm

영문 악보
http://library.timelesstruths.org/library/music/T/Thanks_to_God/Thanks_to_God.pdf

우리말 노래


SMS Men’s Chorus  - 2절까지 

Thanks To God for my Redeemer,
Thanks for all Thou dost provide!
Thanks forTimes now but a memory,
Thanks for Jesus by my side!
Thanks for pleasant, balmy springtime,
Thanks for dark and stormy fall!
Thanks forTears by now forgotten,
Thanks for peace within my soul!

Thanks for prayers That Thou hast answered,
Thanks for what Thou dost deny!
Thanks for storms That I have weathered,
Thanks for all Thou dost supply!
Thanks for pain, and Thanks for pleasure,
Thanks for comfort in despair!
Thanks for grace That none can measure,
Thanks for love beyond compare!

Thanks for roses by The wayside,
Thanks forThorns Their stems contain!
Thanks for home and Thanks for fireside,
Thanks for hope, That sweet refrain!
Thanks for joy and Thanks for sorrow,
Thanks for heav’nly peace with Thee!
Thanks for hope in The Tomorrow,
Thanks Through all eternity!

날 구원 하신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지난 추억인해 감사
주 내곁에 계시네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
외론 가을날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것 감사
헤쳐나온 풍랑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중 위로 감사
측량못할 은혜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 가시도 감사
따스한 따스한 가정
희망 주신것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이 아래는 스웨덴어 가사와 국역
Tack min Gud för vad som varit,
Tack för allt vad du beskär.
Tack för tiderna som farit,
Tack för stund som inne är.
Tack för ljusa, varma vårar,
Tack för mörk och kulen höst.
Tack för redan glömda tårar,
Tack för friden i mitt bröst.

Tack för vad du uppenbarat,
Tack för vad jag ej förstår..
Tack för bön som du besvarat,
Tack för vad jag inte får.
Tack för livets hemligheter,
Tack för hjälp i nödens stund
Tack för nåd som ingen mäter,
Tack för blodets fridsförbund.

Tack för himmel blå i livet
Tack för moln du strött därpå.
Tack för solljus, av dig givet,
Tack för mörkret likaså.
Tack för prövningar och strider,
Tack för hopp som uppfyllts väl.
Tack för dagen som framskrider,
Tack för hopp som slagit fel.

Tack för rosorna vid vägen,
Tack för törnet ibland dem.
Tack för resta himlastegen,
Tack för evigt tryggat hem.
Tack för kors och tack för plåga,
Tack för himmelsk salighet.
Tack för stridens klara låga,
Tack för allt i evighet!

지금 있는 것 주께 감사,
주님 가져가신 것 감사.
지나간 시간도 감사,
지금 이 시간도 감사.
화사하고 따뜻한 봄날 감사,
울적하고 쓸쓸한 가을 감사.
사라진 눈물 감사,
내 가슴의 평안 감사.

주께서 드러내신 것 감사,
나 다 알지 못하는 것 감사.
응답하신 기도 감사,
받지 못한 것도 감사.
영생의 비밀 감사,
궁핍할 때 공급 감사.
측량할 수 없는 은혜 감사,
평안의 새가족 주신 보혈 감사.

내 삶에 푸른 하늘 감사,
비뿌리는 구름 주심 감사.
주님 주신 광명 감사,
마찬가지 어둠도 감사.
시험과 분투 감사,
변치 않는 소망 감사.
다가오는 내일 감사,
내일 실패 닥쳐도 소망 감사.

장미 꽃 어우러진 환한 길 감사,
장미에 가시도 감사.
가야 할 천국 계단 남은 길 감사,
영원히 안전한 집 감사.
십자가와 고통 감사,
천국의 복락 감사.
불 같은 시련 감사,
모든 것 항상 감사.
- trans. into Korean by J.Pascal.Lee

  •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시 92:1-2
  •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