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의 성탄 기사

December 23, 2011 Leave a comment

[1:1] 구약은 아브라함에게도 자손을 약속하고 다윗에게도 자손을 약속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자손은 백성이며 다윗에게 약속된 자손은 왕이다. 예수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하는 것은 이 예수가 백성 약속의 성취임과 동시에 왕 약속의 성취임을 말하는 것이다. 즉 예수가 왕이며 동시에 백성이다. 아담이 왕이면서 동시에 백성이었던 것처럼 예수도 왕이면서 동시에 백성이 되어 ‘몸소 하나님 나라 auto basileia’가 된다. 이 나라에 봉사하도록 임직된 이를 그리스도라 한다. 예수께서 몸소 하나님 나라이시니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 부르는 것이다.

[1:2-16] 계시 역사는 계시하는 역사와 성취하는 역사 둘 다를 일컫는 말이어야 하고 그리고 그 둘은 동행한다. 첫번째 14대는 백성과 왕의 출현 역사이다. 두번째 14대는 출현한 왕과 백성이, 즉 출현한 나라가 임시적이며 불완전함을 보여주는, 그래서 심판받을 수밖에 없음을 증명하는 역사이다. 세번째 14대는 심판 받은 절망과, 그래서 더 이상 불완전하거나 임시적이지 않은 나라를 소망할 수밖에 없는 역사이다. 유대인 중심의 역사는 이와 같아서 자랑할 것이 없고 오히려 다른 것을 자랑해야 하는데 그것은 언약을 지켜 아들을 낳는, 유대인들이 미워하는, 여인들 그것도 이방의 여인들이다.
[1:17] 이 모든 역사의 뜻은 완전하고 분명하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세대이며 일곱 번째의 세대 즉 안식의 세대가 도래하여야 한다.

[1:18-20] 바로 이 때에 마태는 예수의 나심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이야기의 중심 인물은 물론 예수이시지만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이들은 성령, 천사 그리고 여인이다. 예수의 나심은 땅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땅에 속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혈통에게는 아무런 일도 맡겨지지 않는다. (마태의 독자인 유대인은 불쾌하다.) 유일한 유대인인 요셉이 맡은 역할은 ‘지나가는 사람 1’이다. 모든 일이 유대 나라와 관련하여 진행하지만 또한 그 모든 일은 유대인들과 상관없이 진행한다. 오직 이루어지는 것은 예언 또는 계시이다.

(여인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그림자요 모형이다. 여인에게 아들을 낳게 해주는 참된 남편은 성령/하나님이다. 마태는 요셉이 참 남편이 아니라는 것을, 잉태가 ‘성령으로 되었다’는 표현을 18절과 20절에서 연이어 사용하여 강조한다.
여인이 아들을 낳는 것은 여인의 기쁨이며 구원이다. 율법은 의롭긴 해도 이스라엘에게 그리스도를 낳게 해 주지는 못한다. 요셉이 맡은 역할은 마리아가 아들을 낳기까지 의로움 – 율법의 정신 – 으로 함께 지내는 것이고 마리아가 낳은 아들이 장성하기까지 아내와 아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아들이 하늘의 모든 것을 상속하는 때가 이르면, 요셉도 마리아도 다 아들 속으로 들어가 사라져야 한다. 장성한 아들은 자웅동체가 되어, 몸소 이스라엘 즉 몸소 아내가 되고 또한 몸소 남편이 된다. 아들은 몸소 왕이 되고 몸소 백성이 되어 아들 자체로 나라가 된다. 이것이 요셉이 ‘의롭다’ 하는 말에 대한 설명이다)

[1:21-25] 여인(마리아 또는 처녀, 그 전에는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의 아들은 두 개의 이름을 갖는다. 하나는 구원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이다. 구원의 이름 예수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 심판의 이름 임마누엘은 믿음 없는 아하스와 그 아하스의 백성을 심판한다. 심판은 임마누엘이 나타나기만 하면 즉시 시작된다. 그래서 임마누엘의 다른 이름은 ‘마헤르샬랄하쉬바즈’이다. 마태는 독자에게 ‘속히 임하는 심판이 시작되었는데 너는 어느 쪽이냐, 아하스냐 이사야냐’ 하고 질문하는 것이다.

[2:1-3] 마태는 예수의 ‘왕으로 오심’과 ‘백성으로 오심’ 중에서 먼저 왕으로 오심에 주목함으로써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래서 ‘헤롯왕 때’이다. 이 헤롯왕 때라는 지시어는 시간의 좌표가 아니라 헤롯-빌라도-가이사가 왕으로 있는 시대의 좌표를 보여주는 것이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등장하여 버젓이 ‘왕’노릇하고 있는 헤롯에게 새로운 ‘왕’에 대하여 질문한다. 하나의 질문에 두 가지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된다. 너 헤롯은 왕이 아니고 진짜 왕이 왔다는 것과, 진짜 왕을 찾아 경배하려는 참 백성은 이스라엘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 별은 박사들을 곧장 베들레헴으로 인도하지 않고 헤롯 왕 앞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박사들은 콧털을 건드리는 정도가 아니라 강력한 원투 펀치를 헤롯과 헤롯의 백성에게 올려 먹인다.

[2:4-6] 헤롯은 자신이 왕으로 있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를 갖고 있어서 왕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리스도에 대하여 탐문할 수 있을 정도이다. 전문가들은 전문가답게 적절한 대답을 한다. 왕-그리스도가 나는 곳은 떡집-베들레헴이다. 왕 헤롯은 예루살렘 왕궁에 있고 왕 예수는 떡집에 떡으로 있다. 헤롯이 백성의 떡을 앗아 자기 입에 넣는 왕이라면 예수는 친히 떡이 되어 백성의 양식이 되어주는 왕이다. 이것이 예수의 베들레헴에 나심의 의미이다. 그래서 마태는 미가 뒤에 에스겔 또는 사무엘하 5:2을 이어붙여 베들레헴에서 나는 이는 반드시 ‘목자’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은 목자가 아니면 왕이 아니다. ‘목자-왕’은 자신의 생명을 죽음에 내주고 백성을 살린다. 목자는 자신을 양의 꼴로 내준다. 양은 목자를 먹고 산다. 그래서 왕으로 오신 예수는 떡집-베들레헴에 나시는 것이다.

[2:7-12] 헤롯은 살인자의 마음으로 왕을 찾고 박사들은 경배를 위해 왕을 찾는다. 박사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하다. 10절이 그것을 보여준다. 기뻐하였다고만 해도 될 것을 온갖 말을 덕지덕지 덧붙이고 반복하여 기뻐하였다고 한다. 박사들은 어느 덧 열방 또는 열방의 왕이 이스라엘 왕을 예방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그것은 열방의 대표로 예물을 갖고 솔로몬을 방문한 스바 여왕을 떠올리게 하거나 이사야 60장의 성취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왕으로 오신 예수 이야기에서 백성으로 오신 예수 이야기로 전환되고, 마태는 두 번의 인용을 통해 헤롯 나라의 정체를 폭로한다.

[2:13-15] 유대땅-이스라엘이 애굽이다.
마태는 유대땅에서 애굽으로 탈출하는 예수를 두고 호세아를 인용하여 이것이 출애굽이라 한다. 마태가 인용한 호세아의 애굽은, 당연히 헤롯이 왕으로 있는 유대땅이다. 유대땅에서 헤롯은 바로 왕의 자리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탄생을 저지하고 있다. 예수는 새로운 백성이다. 예수가 참이스라엘이고 예수를 반대하는 것이 애굽이다.

[16-18] 유대땅-이스라엘이 바벨론이다.
마태는 출애굽의 그림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포로로 잡혀가던 때의 그림을 가져온다. 라마는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잡아가던 포로집결지로서, 마태는 옛날 이스라엘이 잡혀가던 때에 발생한 일이 지금 여기서 일어났다고 말하면서,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없애버리는 바벨론 군대 역할, 라헬-이스라엘을 애곡하게 하는 일을 헤롯의 군대가 맡았다고 말함으로써 이 유대땅-이스라엘이 바로 바벨론이라고 폭로하는 것이다.

[2:16-23] 그렇다면 참된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을 잘 하였고, 또 새로운 약속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게 잘 돌아왔을까. 마태는 그렇다고 한다. 오직 한 사람뿐의 모습이긴 하지만 이제 나사렛에서 사는 이 예수가 출애굽하였던 참 이스라엘이요, 돌아온 스알야숩(남은 자가 돌아오리라)이다. 나사렛은 유대땅 갈릴리의 비천한 곳이고(요 1:46 등), 그리스도가 낮은 곳으로 오시고 낮은 것을 거처로 심으실 것은 많은 선지자들이 말해 온 것이다(23절의 선지자는 복수).

강용흘의 [초당]

December 2, 2011 Leave a comment

을유, 삼중당, 동서, 삼성 등의 문고본들을 읽어치우던 시절 (일단 책값이 쌌다. 삼성문화문고는 100원이었다), 을유에선가 어디선가 만난 것으로 기억하는 강용흘 선생님의 [초당].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집위원이었던 것만으로도 어린 나를 끌어 당기기에 충분했는데, 읽으면서는 완전히 몰입해버렸고, 읽고 난 후의 여운은 읽기 전의 작가의 매력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되고 말 정도였다.

아래 링크는 김지현씨가 신동아의 논픽션 공모에 응한 강용흘 선생님에 대한 르뽀인데, 어제 기차간에서 읽고선, 함께 할 사람 있을까 싶어 하며 여기 소개한다.

재미문학가 ‘초당’ 강용흘의 롱아일랜드 변주곡

Categories: 단상, 문학

국화차

November 24, 2011 Leave a comment

목이 뚝
떨어진 거기
뜨거운 피가 고요하다.

목 꺾어 넘겨준 액체라야
몸을 데운다. 그렇지,
열혈 인생이다.

벌건 눈으로 뜨겁게
뜨겁게 두드릴 쌍피는
없고

코피 흐르는 인생
열혈인생이다.

Categories: 단상, 문학 Tags: , , , ,

FTA, 정치, 교육

November 24, 2011 Leave a comment

덕군德君은 부덕하다. 자신을 부덕하다 하지 않은 덕군이 있던가. 그러나 오늘날 청와대의 그와 그의 친구가 군일리 없으니 부덕할 리도 없다면 오히려 백성이 부덕할 수 밖에. 시대가 바뀌어도 백성은 늘 백성이니 백성의 부덕 역시 예나 지금이나 다를 수 없는 것. 때로는 참는 것. 그리고 때로는 봉기하는 것이다. 아, 어찌 여섯 입에 넣으려고 네 손에서 빼앗는가.

정政은 정正이라 했는데 정正이 언제 유有와 물物과 다多로 바뀌었나. 경제가 아니라 윤리를 공약하는 정치는 불가망이겠지? 올라가지 말고 내려가라하는 학교도 불가망이겠지? 여기에 우리가 살고 있다. 교회의 선생들아, 그리고 학교의 선생들아. 정직하라. 정직하라. 해야 할 말에 정직하라.

Categories: 단상

사도행전 이해 II

November 1, 2011 Leave a comment

사도행전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가져야 하는 전제가 있다. 그것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일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물론 복음서나 사도행전이나 서신서나 묵시문학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일체적 통일성 안에서 접근할 수 있(어야 하)지만 여기서 사도행전과 복음서의 일체성을 말함은 성경 전체의 그 당연한 통일성 안에서 ‘더욱 독특한 일체성’을 말함이다. 나는 복음서 전체를 ‘복음서 전서,’ 사도행전을 ‘복음서 후서’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사도행전과 복음서의 일체성에는 두 가지 관점으로 접근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주제의 연속성과 내용 전개의 일치이다.

1. 주제의 연속성 – 천국 아이디어로 본

1.1 복음서에서의 천국

사도행전과 복음서 사이에 주제적 연속성을 무엇보다 현저하게 보여주는 것은 ‘천국’ 아이디어이다.

    복음서 시작 부분과 천국

마태복음은 다윗과 아브라함을 언급하며 그 운을 뗀다. 다윗은 왕이며 아브라함은 백성이다. 다윗에게는 왕 약속이 있고 이브라함에게는 백성 약속이 있다. 마태는 족보를 내밀며 예수가 왕으로 옴과 동시에 백성으로 왔다고 말하여, 왕이면서 동시에 백성인 예수 그가 ‘몸소 하나님 나라’로 왔다 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등장과 동시에 천국을 말한다. 세례 요한은 구약 전체가 한 인격의 모습으로 나타난 구약의 요약판이니 그가 말하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말에서 ‘천국’은 ‘예수’와 동의어이다. 예수께서도 비로소 전파하기 시작하실 때에 하신 말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의 ‘천국’ 역시 ‘예수’와 동의어이다. 복음서는 처음부터 ‘천국’과 ‘예수’를 동의어로 사용한다.

그래서 ‘천국’을 환영하는 것이 ‘예수’를 환영하는 것이고,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천국’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을 증거하는 것과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 서로 다른 말이 전혀 아닌 상태로 복음서는 진행한다.

    산상수훈과 천국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이어지는 소위 산상수훈에 대한 오해가 많은데 이는 예수 자신이 왕임과 동시에 ‘백성임’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기인한 것이다. 산상수훈은 독자에게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이루실 것을 말씀하심이다. 인간 중에는 심령의 가난함으로는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백성이 없고 인간 중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만큼 샬롬-에이레네를 가져올 수 있는 왕이 없다. 예수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셔서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시면, 그리고 이 예수를 누군가가 믿으면, ‘그제서야’ 그 누군가도 이 예수의 공로 덕택에 심령이 가난한 백성과 화평을 나누는 왕으로 간주된다. 이것을 ‘예수믿는다’고 하는 것이다.

복음서의 첫머리에 마태복음이 있어서 마태복음을 들어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복음서 전반에 걸친 나머지의 내용도 다르지 않다. 예수의 말씀하심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물론이거니와 그 행하심 역시 모두가 몸소 천국이신 예수 자신을 가리켜 증거하는 것들이다.

    천국-예수를 보이는 이적

모든 이적들은 싸인sign이다. 싸인이 아닌 이적은 없다. 오실 그이를 묻는 요한에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하신 것처럼 이적은 ‘그가 오셨다는 표적’이다. ‘그’는 구약 전체 또는 인류 전체가 기다리는 이이다. 그가 오면 나라도 온다. 그가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적들은 천국 도래의 표지이다.

    천국-예수를 말하는 비유

비유가 아니면 한 말씀도 않으셨다고 한 것처럼 비유는 말씀의 본령인데 비유마다 천국 비유이다. 기적과 이사가 예수 당신을 알리시거나 감추시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비유 역시 천국이 어떠함을 감추시거나 알리시는 것인데,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더 많이 알아듣고 더 많이 가지게 되지만, 거절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깊이 감추어져서 천국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져 시들어가고 꺼져간다. 시들어가고 꺼져가는 것은 그냥 내버려두신다.

    이적과 비유의 결정판 십자가와 부활

그 모든 비유와 표적의 결정판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어버리고 죽어버린 그 예수를 아버지가 살려버리면 더 이상 ‘예수가 하나님 나라이다’ 하는 것을 알려주는 비유도 표적도 필요없다.
십자가는 자기 살을 찢어 나누어먹이는 선한 왕의 즉위식이며(그래서 요한복음은 들림이 영광을 얻는 것이라 말한다), 동시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백성의 현현이다.
부활은 더 이상 임시적이지 않은 영원한(=참된) 왕의 즉위식이고, 동시에 영원한(=참된) 백성의 창조이다.
물론 사도행전에는 다른 의미에서 필요한 표적이 있다. 이는 뒤에 언급할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복음서 전체는 ‘천국-예수’ 이야기로 가득하다.

1.2 사도행전에서의 천국

천국 이야기로 시작해서 천국 이야기로 끝나는 사도행전 역시 복음서 못지 않게 천국 이야기로 가득하다.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40일동안 ‘천국’ 이야기만 하셨다면서 시작하는데 이 천국-예수를 사도행전에서는 자주 ‘도/길 ὁδός ’라는 말로 바꾸어 이야기한다. 빌립의 경우에서처럼 ‘하나님 나라’라고 분명하게 언급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베드로의 입에서 생명의 ‘길’(2:28)로 나타나기도 하고,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에게는 그 ‘도’(9:2, 22:4), 박수 엘루마 이야기 속에서는 주의 바른 ‘길’(13:10), 빌립보의 한 여자 점바치 이야기에서는, 악한 의도였기는 하나, 바울 일행을 구원의 ‘도’를 전한다고 표현되고(16:17), 아볼로가 배운 것은 주의 ‘도’ 혹은 하나님의 ‘도’였고(18:25-26), 에베소에서는 바울이 하나님 나라를 강론하자 어떤 이들이 이 ‘도’를 비방하였다 하였고(19:8-9), 결국은 이 ‘도’로 인해 에베소에 소요가 일어났다고(19:23) 한다. 이 모두가 천국 이야기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이야기도 하나님 나라로 마감한다. 그리하여 사도행전은 천국으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난다.

 

2. 내용 전개의 일치

복음서는 독자를 윤리적 ‘삶’으로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천국을 소개하고 증거하여 듣는 이가 양단간에 결정하도록 촉구한다. 사도행전 역시 그렇다. 사도행전은 독자에게 선교적 삶으로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천국을 소개하고 증거하는 복음서의 내용을 그대로 답습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사도행전 교회의 신분을 확증한다.
복음서에서는 예수 자신이 예수 자신을 증거하고, 사도행전에서는 교회가 예수를 증거한다. 그렇게 하여 교회의 신분, 즉 사도행전의 교회가 ‘예수의 교회’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목적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임의로 오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따라 오고 보내심을 따라서 온다. 예수께서 성령을 받고 맡은 일을 시작하시는 것처럼, 교회도 성령을 받고 출발한다(행 2). 예수께서도 곳곳에서 가르치시는 것처럼 사도행전의 교회도 곳곳에서 가르치고 강론한다. 그 내용은 동일하다. 예수는 자기를 증거하시고 교회도 예수를 증거한다.

예수께서도 곳곳에서 기적과 이사를 행하시고 교회도 곳곳에서 기적과 이사를 행한다. 그 능력의 근거도 동일하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그 일을 행하시고 교회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 일을 행한다.

예수께서도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시지만 교회도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하지만 예수도 교회도 때가 되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다. 예수는 예루살렘까지 가야 하고, 교회는 로마까지 가야 한다.

예루살렘은 예수의 땅끝이고 로마는 교회의 땅끝이다. 땅끝은 다른 곳이 아니다. 예수와 교회를 죽이는 곳이 땅끝이고 예수와 교회가 죽기까지 나아가는 곳이 땅끝이며 예수와 교회가 죽는 현장이 땅끝이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유대땅의 가장 깊은 곳)은 사도행전의 로마와 의미상 동격이다. 예루살렘과 로마는 예수와 예수의 교회를 처치해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통일장을 형성해 있는 동일한 장소이다.

[일찌기 마태는 자기의 복음서에서, 유대땅을 떠나는 아기 예수에 대한 이야기에서 의미심장한 유비를 건넨적이 있다. 어린 예수께서 헤롯의 칼을 피해 유대땅에서 피난 길을 떠나는 광경을 두고 호세아서를 인용하여 예수의 유대땅 떠남이 출애굽이라 한 것이다.
새 이스라엘 - 예수를 죽이는 곳이 애굽이다. 그리고 그 애굽이 땅끝이다. 그리고 그 땅끝에서 일어나는 살해와 부활 사건 이야기가 성경 이야기이고 복음서와 사도행전 이야기다. ]

예수께서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를 몇 번이나 오가셨던 것처럼 사도행전의 교회/바울도 온 세계를 몇 번씩이나 오간다. 예수께서도 미쳤다는 말을 들으셨던 것처럼 교회도 미쳤다는 말을 듣는다.

예수께서도 광풍이 이는 갈릴리 바다를 제자들과 함께 건너시고 교회(바울)도 유라굴로로 위험한 지중해를 건넌다. 바울이 지중해를 건너다가 유라굴로를 만나고 이하 진행되는 사건은 단순히 여행 중에 일어나는 바울 개인의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여행은 교회의 진행이다. 여기서 바울은 교회다. 바울과 함께 진행하는 교회는, 예수께서 바다에 빠져 그 걸음이 멈출 수 없음같이, 바울도 바다에 걸려 멈출 수 없다. 예수께서도 바다를 건너 계속 일하셔야 했던 것처럼 바울도 바다를 건너 계속 일해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바다에 빠져 죽을 수 없는 것처럼 바울도 바다에 빠져 죽을 수 없다. 예수는 예루살렘까지, 바울은 로마까지 가야 한다.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아는 것처럼 아그립바도 바울의 무죄를 안다. 하지만, 예수가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바울도 재판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는 예루살렘 – 애굽의 중심 – 에서 죽음의 판결을 받았지만 아버지께서 그를 살리셨고, 바울/교회도 로마 – 세상의 중심 – 곧 땅끝에서 그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며 오늘도 살아 있다. 로마는 교회를 죽이지 못하였다. 예수의 부활이 예수의 죽음을 의롭다 증거하는 것이었듯이, 오늘날 교회가 살아 있다면 그것은 사도행전의 교회가 예수의 교회임을 증명한다. 이제 교회의 남은 일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교회가 계속 교회로 살아남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인내이다. 교회의 끝까지 참음이 교회의 승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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