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토 구결

추구는 조선 후기 또는 말기의 것인데 누가 엮었는지는 알 수 없다.
天高日月明 地厚草木生
月出天開眼 山高地擧頭
東西幾萬里 南北不能尺
天傾西北邊 地卑東南界
春來梨花白 夏至樹葉靑
秋涼黃菊發 冬寒白雪來
日月千年鏡 江山萬古屛
東西日月門 南北鴻雁路
春水滿四澤 夏雲多奇峯
秋月揚明輝 冬嶺秀孤松
日月籠中鳥 乾坤水上萍
白雲山上蓋 明月水中珠
月爲宇宙燭 風作山河鼓
月爲無柄扇 星作絶纓珠
雲作千層峰 虹爲百尺橋
秋葉霜前落 春花雨後紅
春作四時首 人爲萬物靈
水火木金土 仁義禮智信
天地人三才 君師父一體
天地爲父母 日月似兄弟
夫婦二姓合 兄弟一氣連
父慈子當孝 兄友弟亦恭
父母千年壽 子孫萬世榮
愛君希道泰 憂國願年豊
妻賢夫禍少 子孝父心寬
子孝雙親樂 家和萬事成
思家淸宵立 憶弟白日眠
家貧思賢妻 國亂思良相
綠竹君子節 靑松丈夫心
人心朝夕變 山色古今同
江山萬古主 人物百年賓
世事琴三尺 生涯酒一盃
山靜似太古 日長如少年
靜裏乾坤大 閒中日月長
耕田埋春色 汲水斗月光
西亭江上月 東閣雪中梅
飮酒人顔赤 食草馬口靑
白酒紅人面 黃金黑吏心
老人扶杖去 小兒騎竹來
男奴負薪去 女婢汲水來
洗硯魚呑墨 煮茶鶴避煙
松作延客蓋 月爲讀書燈
花落憐不掃 月明愛無眠
月作雲間鏡 風爲竹裡琴
掬水月在手 弄花香滿衣
五夜燈前晝 六月亭下秋
歲去人頭白 秋來樹葉黃
雨後山如沐 風前草似醉
人分千里外 興在一杯中
春意無分別 人情有淺深
花落以前春 山深然後寺
山外山不盡 路中路無窮
日暮蒼山遠 天寒白屋貧
小園鶯歌歇 長門蝶舞多
風窓燈易滅 月屋夢難成
日暮鷄登塒 天寒鳥入簷
野曠天低樹 江淸月近人
風驅群飛雁 月送獨去舟
細雨池中看 微風木末知
花笑聲未聽 鳥啼淚難看
白鷺千點雪 黃鶯一片金
桃李千機錦 江山一畫屛
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
棹穿波底月 船壓水中天
高山白雲起 平原芳草綠
水連天共碧 風與月雙淸
山影推不出 月光掃還生
水鳥浮還沒 山雲斷復連
月移山影改 日下樓痕消
天長去無執 花老蝶不來
初月將軍弓 流星壯士矢
掃地黃金出 開門萬福來
鳥逐花間蝶 鷄爭草中蟲
鳥喧蛇登樹 犬吠客到門
高峯撐天立 長江割地去
碧海黃龍宅 靑松白鶴樓
月到梧桐上 風來楊柳邊
群星陣碧天 落葉戰秋山
潛魚躍淸波 好鳥鳴高枝
雨後澗生瑟 風前松奏琴
馬行千里路 牛耕百畝田
馬行駒隨後 牛耕犢臥原
狗走梅花落 鷄行竹葉成
竹筍黃犢角 蕨芽小兒拳
天淸一雁遠 海闊孤帆遲
花發文章樹 月出壯元峰
柳色黃金嫩 梨花白雪香
綠水鷗前鏡 靑松鶴後屛
雨磨菖蒲刀 風梳楊柳髮
鳧耕蒼海去 鷺割靑山來
花紅黃蜂鬧 草錄白馬嘶
山雨夜鳴竹 草蟲秋入牀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露凝千片玉 菊散一叢金
白蝶紛紛雪 黃鶯片片金
洞深花意懶 山疊水聲幽
氷解魚初躍 風和雁欲歸
林風涼不絶 山月曉仍明
竹筍尖如筆 松葉細似針
魚戱新荷動 鳥散餘花落
琴潤絃猶響 爐寒火尙存
春北秋南雁 朝西暮東虹
柳幕鶯爲客 花房蝶作郞
日華川上動 風光草際浮
明月松間照 淸泉石上流
靑松夾路生 白雲宿簷端
荷風送香氣 竹露滴淸響
谷直風來急 山高月上遲
蟋蟀鳴洞房 梧桐落金井
山高松下立 江深沙上流
花開昨夜雨 花落今朝風
大旱得甘雨 他鄕逢故人
畫虎難畫骨 知人未知心
水去不復回 言出難更收
學文千載寶 貪物一朝塵
文章李太白 筆法王羲之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花有重開日 人無更少年
白日莫虛送 靑春不再來
十一月五日暫往西張 11월 5일 서장에 잠시 머무르다.
城隈細路入沙汀 성을 끼고 난 사잇길로 모래톱에 들어서다.
絮帽沖風日再經。두터운 모자 속으로 스미는 바람, 또 하루가 가는구나.
歉歲村墟更荒惡,흉흉한 세월에 마을은 올해도 황폐한데,
窮冬人影亦伶俜。겨울이 깊어서 사람들도 비틀거리네.
林煙漠漠鴉邊暗,숲에는 자욱한 안개, 어둠도 짙어오는데, (鴉 : 검을 아)
山骨稜稜雪外靑。산에는 첩첩이 바위, 눈 비낀 하늘에 푸른 빛 조각. (骨 : 山岩; 稜稜=棱棱)
四十年來此寒苦,사십에 찾아 온 이 추위와 아픔이라니,
凍吟猶記隴關亭。얼어붙은 소리 흘리며 농관정에서 적다.
十八家詩抄 – 卷二十五
(이 글은 내가 조금 발을 담그고 있는 선교단체의 게시판에 올렸던 글입니다. 여기 블로그에서도 관계된 글을 번역하다가 마무리를 못하고 묵혀두고 있는 포스트들이 있는데 http://parabolog.wordpress.com/page/3/?s=purpose+driven에서 볼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이 누군가를 그분의 목적을 위해 준비시킬 때마다 40일이 걸렸다. 1. 노아의 삶은 40일 동안 내린 비로 변화되었다. 앞으로의 40일이 우리를 변화시킬 것이다. |
1. 노아의 삶은 40일 동안 내린 비로 변화되었다.
노아는 비내리는 40일 동안 변화된 것이 아니다.
노아는 이미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였고, 의인이었고, 당세에 완전한 자였으며, 하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창 6:8-9).
홍수 후에 새롭게 창조된 세계에서 아담과 하와가 처음 지음을 받았을 때의 모습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과 잔치를 누리는 모습을 보면(9:20-21) 그가 홍수를 겪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새롭고 풍성하게 된 것은 분명하다고 해야 하겠지만, 비내리는 40일이 노아의 변화를 위한 것이라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40일 전에는 노의 삶이 어떠했고 40일 후에는 노아의 삶이 어떻게 변했다는 말인가. 120년간 오직 말씀에 의지하여 마른 땅에서 배를 짓고 있었던 순종의 노아가 40일간 비가 내리기 전에는 노아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몰랐다는 것인가?
설명할 것도 없다. 비내리는 40일은 노아의 변화의 시간이 아니라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심판의 시간이다.
2.모세는 시내산에서 보낸 40일 동안 변화되었다.
모세가 산에 올라 40주야를 보낸 것은 두 번이다. 한 번은 첫번째 돌판을 받으러 올라갔을 때이고(출 24:12-18), 또 한 번은 두번째 돌판을 들고 올라 갔을 때이다(34:1, 28). 그렇다면 릭 워렌은 어느 40일에 모세가 변화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어느 40일이든 그 40일을 보내고 나서야 모세는 자기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되었다는 말인가가? 40일 전의 모세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었으며 40일 후에 변화된 모세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이라는 말인가?
모세가 40일을 산 위에서 보낸 시간은 모세의 변화를 위한 시간이 아니다. 모세는 변화받기 위해 산에 올라 간 것이 아니라 산에 올라 내게 보이라는 말씀이나 올라와 내게 보이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올라간 것이다(출 24:12; 34:2). 모세의 변화를 이야기하려면 미디안에 보내야 했던 40년이나 그 끝무렵에 여호와께서 꺼지지 않는 불 가운데서 만나 그를 부르신 사건을 언급해야 정당할 것이다.
3. 정탐꾼들은 약속의 땅을 40일동안 바라보면서 변화되었다.
오호 통제라! 정탐꾼들이 약속의 땅에서 40일을 보내면서 변화되었다니!
민수기 13장과 14장을 읽어 보라. 정탐들은 40일간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하였고 그로 인해 백성은 원망과 두려움과 불신에 이르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2주나 한 달이면 갈 수 있는 가나안 여정이 40년으로 늘어난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이 정탐들이 가나안을 정탐한 40일의 매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여 40년간 광야를 돌면서 원망과 불신의 세대가 다 죽기까지 하나님께서 그 길을 늦추셨던 것이다.
어찌 이 정탐의 일을 두고 ‘40일간의 영적 여정을 위한 안내서’가 왜 40일을 의미심장하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로 제시하는지 통탄할 일이다. 혹 모르겠다. 40일 여정을 잘못 보내면 이런 중대한 범죄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는.
4. 다윗은 골리앗의 40일간의 도전으로 변화되었다.
계속 놀람을 금할 수 없다. 어쩌면 이렇게 담대하게 글을 쓸 수 있는 거지?
다윗의 세 형은 이미 전쟁 중에 있고 골리앗은 날마다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고 있었다. 그런 기간이 40일이었다. 그런 중에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전쟁터 엘라 골짜기까지를 왕래하면서 아버지 이새의 심부름도 하고 베들레헴에서는 양도 치고 있었다.
사무엘상 17장을 읽어보라(40일 이야기는 16절에 나온다). 어떻게 무슨 근거로 다윗이 40일 동안을 골리앗의 도전을 받았으며 그 도전을 통해 다윗이 변화받았다고 하는가?
성경은 골리앗이 40일동안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것을 다윗이 알았다고 하지도 않는다. 40일의 마지막날 또는 40일 직후의 어느날, 아버지 이새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도착한 다윗은 그제서야 골리앗의 조롱하는 말을 듣게 된다.
40일을 통한 변화를 말하기 전에 다윗이 만류하는 사울에게 자기의 과거를 고백하는 말을 들어 보라.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삼상 17:34-37a).
그리고 이 말씀도 읽으며 다윗이 40일간의 여정으로 통해 변화되었다고 하는 것이 정당한지 생각해보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삼상 16:13)
예상되는 질문과 그 외 몇 가지를 주절거리며 마쳐야 하겠습니다.
릭 워렌은 앞선 책 새들백교회 이야기(원제: 목적이 이끄는 교회)에서도 성경을 이리저리 비틀어 마음대로 끌어가더니 이 책에서도 변화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담대한 저자도 놀랍고 이런 책을 낸 릭 워렌이 목회하는 교회같은 교회가 되지 못해 부러워하는 마음으로 책을 이렇게 저렇게 권하고 읽는 한국 교회도 놀랍습니다.
성경으로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이 릭 워렌은 불신자일까요? 책의 내용들을 살펴 보면 그를 불신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자로든지 목회자로든지 여러 모로 인기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큰 교회와 작은 교회 사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교회를 부러워하게 만들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위험 인물인 것은 거의 틀림없습니다.
무엇보다 이 비평의 연속성 상에서 말해 본다면, 그가 무책임한 신앙 서적 저자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함께 40일 여행을 시작하자고 촉구하면서 40일 여행의 중요성을 말하는 근거로 든 여덟 가지 예가 어떻게 하나같이 거짓말일 수 있는 겁니까? 그리고 이런 서문이 있는 책을 위해 기꺼이 추천사를 쓴 한국의 대표적인 유명 목사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완벽한 신앙 서적은 없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좋은 책이나, 좀 나은 책이나, 좀 못한 책이나 거의 쓸모 없는 책은 있겠지만 완벽한 신앙서적은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는 신앙 서적에 연연해 하지 마시라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많은 경우 성경은 읽지 않고, 그래서 성경으로부터는 도움을 얻지 못하고 소위 ‘좋은 신앙서적’으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찾아 다닙니다. 성경에서 위로를 얻지 못하는데 신앙서적으로부터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요? 또 얻을 수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바람직한 일일까요?
둘째는 성경을 펼쳐놓고 읽을 것을 권합니다. 문자적으로 신앙서적 바로 옆에 성경도 펴 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비춰 보아서 수납할 만한 내용/주장인가를 생각하면서 읽으시라는 겁니다. 그렇게 읽으시면서 아멘 할 부분은 아멘하고, 새삼스럽게 깨달은 부분은 감사하고, 성경과 맞지 않는 부분은 버리고, 그러면서 읽는 거지요.
(이 책 안에도 귀한 내용이 있음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행하게도 서문에서는 취할 부분이 없었습니다. 서론이 없었더라면 책은 조금 더 좋아질 수 있을 뻔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땠습니까?